경죽당景竹堂
11. 경죽당景竹堂

경죽당景竹堂
소재지: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단목
 
경죽당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진평군의 7남인 통훈대부 장수현감을 지낸 죽헌공 하성河惺의 제향을 봉향하기 위해 종원들이 세운 재실이다. 동향에 죽헌공의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影幀閣은 해가 오래되어 무너져 비바람을 막기 어렵게 되자 종손 창봉昌鳳이 재원을 출연 중수하여 현재와 같이 재실과 영정각의 미간이 새롭게 바뀌어 백대의 재실이 되었다.
1) 중건 기
진주의 단목은 우리 진양 하가가 대대로 살아온 마을인데 가문이 매우 번성하여 우뚝하게 남쪽 지방의 이름난 마을의 하나이다. 마을 가운데 각 다섯 파派의 재사齋舍가 화려하게 서로 연이어 있는데, 경죽당은 그 하나이고 옛 통훈대부 장수현감 죽헌선생의 후손이 선생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선생은 소경왕昭敬王-선조 시대의 사람으로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고 인자하였으며 뜻과 생각이 밝고 민첩하였으며 충순하였다. 수우 최성생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니 수우의 학문은 곧 남명의 학문이었으므로 경의의 참뜻을 터득하여 가슴에 붙들어 놓치지 않고 넓히고 채워나갔으며, 학문에 둔 뜻이 활달 하였고 큰 법도가 있었다. 선비들과 벗 사이에서 두터운 명망이 있었으므로 함께 도의로 교유한 자들이 모두 당대의 대현들이었다. 동계桐溪 정온鄭蘊 한사 강대수寒沙姜大遂 겸재 하홍도謙齋河弘度 노파 이흘蘆坡李屹 태계 하진台溪河溍같은 선생들이, 그가 별세하자 모두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기어 뇌사를 지어서 조문하였다.
동계선생 만사에,"삼척三尺 남짓한 거문고 안고 탄주하면, 그대만 귀 기우려 곡조를 알아들었네, 지금 현을 끊어 다시 잇기 어려우니, 맑은 소리 덮어두고 다시 타지 않으리라,"고 하였으니 그 명망이 두터웠음을 알만 하다 그가 생부인 진평군晉平君의 상을 당한 것이 임진년에 왜적이 날뛰던 때였으나 곡읍哭泣 하고 제사 드리는 절차를 예법에 따라 마쳤고 3년상을 벗고 망우당 곽선생의 의병의 군진에 가서 가담하였으니 전술과 전략이 ‘화왕록火旺錄’에 모두 기재되어있다. 그리고 정유재란에 아우 단주丹洲 선생 변忭을 난리통에 잃었는데 일본에 붙들려가서 지낸 지가 무릇 19년이나 되었다. 셋째 형 진사 창주滄洲 선생 증憕과 막내 동생 진사 단지丹池 협悏과 함께 갖은 고생을 다하여 찾아서 마침내 생환하게 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하씨의 효성과 우애를 흠모하여 시를 지어 읊었으니 그 얼마나 거룩한가.
오호라! 선생의 살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이다. 그 남긴 교훈과 양향이 지금껏 사라지지 않았으니 선생의 선생다움을 알만하다. 경죽당이 세월이 오래되어 퇴락하여 바람과 비를 가리기가 어려웠으므로 주손 창봉昌鳳이 먼저 큰 자금을 내놓고 그 나머지는 각기 힘에 따라 부담하여 옛터에 모두 새로운 재목으로 옛 것을 바꾸어 새로 짓고 영각影閣을 보수 하였다. 이에 높고 찬란히 새롭게 되어 백세의 멋진 풍경되었으니 조상祖上의 뜻을 이어나가는 도리를 다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요즈음 어떤 세상인데 어디에 이런 정성이 있겠는가. 일을 시작할 즈음에 주손 창봉昌鳳이 족숙 병열炳列씨를 통하여 동근東根에게 상량문을 구하기에 동근이는 늦게 태어났고 사람됨이 변변찮아 선생 행실과 덕망의 만분의 일도 비슷할 수 없으나 고맙게도 방후손의 의리가 있으니 글을 못하는 사람이지만 사양할 수 없어 정중히 육위가六偉歌를 지어 노래하였다. 얼마 뒤에 또 기문을 묻기에 이것도 사양할 수 없었으므로 삼가 중건의 기문을 지었을 따름이다.
重建記
晋之丹牧吾河之世庄而門楣甚盛蔚然爲南州之一名村也洞中名有五派之丙舍輝煌相望景竹堂卽其一而故通訓大夫長水縣監竹軒先生之後孫爲先生作也先生昭敬王時人而恣性孝友慈仁志慮明敏忠順從學守愚崔先生之門守愚之學卽冥翁之學也得聞敬義眞詮服膺勿失而擴充志學豁達有大度負重望於士友之間故所與爲道義交者皆當世大賢若鄭桐溪蘊姜寒沙大遂河謙齋弘度李盧坡圪河台溪溍諸先生也其歿也皆嗟惜爲誄哭之桐溪先生挽略曰獨抱孤桐三尺强惟君傾耳解峨洋如今絃斷知難續掩却淸音更不張重其雅望可槪也其丁本生考晋平君之憂于壬燹搶懷之日而哭泣奠節如禮以終服闋赴于忘憂堂郭先生之義陣謀劃薵策俱載火旺錄又丁酉再亂失弟丹州先生忭於亂之中俘在日國凡十有九年而與叔兄進士滄洲先生憕季弟進士丹池先生悏苦幸搜探竟爲生還時人欽慕河氏之孝友爲之歌詠何其韙哉嗚呼今距先生之世四百有年而其遺風餘韻尙今不衰則可知先生之爲先生也堂歲久朽敗難掩風雨故冑孫昌鳳首先孫出巨資餘各隨力担之就舊址而摠以新材易舊爲新補修影閣於是乎輪渙爲新足爲百世之雲物則能盡繼述之道也顧今何世而何其慤哉經始之初冑孫昌鳳介族叔炳列氏求樑頌於東根東根生晩人微未能紛彿乎.先生行德之萬一忝在傍裔義不可以不文辭敬述偉歌訟之旣而又問記是亦不可辭故謹敍之爲重建記爾
                               歲民國庚午榴夏節傍後孫成均館典儀東根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