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정사松岡精舍
11. 송강정사松岡精舍

소재지: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단목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 진평군 하위보河魏寶의 장자 송강 하항河恒의 제향을 올리는 재실이다.
진주 청계서원에 송강 하항河恒공과 송강공의 자 인상仁尙공 부자를 배향하고 향사하여 오다가 서원의 철폐로 제향을 올리지 못하였으며, 송강松岡으로 명하여 남아 있던 재실도 또한 중간에 화재로 소실되어 세상의 변천으로 점점 아득하여졌다. 이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송강정사를 중건하고 일헌一軒을 정하여 모송慕松의 편액을 걸고 우모하는 장소로 삼았다.
 
 1) 중건기重建記
남명선생은 연원이 성대하여 남방에 두루 퍼져있고 진양은 그 명성과 인망이 높은 사람들의 구향이라 여운이 미친 바가 마땅히 다른 고을보다 특별한 점이 있다. 송강선생 하공은 친히 옷을 걷고 당에 오른 반열에 들었으며 동문 제현으로 더불어 서로 강마하여 그 덕을 이룩하였다. 그 내수에 돈독하고 척사에 엄정하며 뜻 세워 함양하고 문달을 구하지 아니함은 더욱이 노선생의 법문 규법이 그러하다.
  그 아들 모송헌공은 일찍 진사에 합격하여 혼조의 흉론이 바야흐로 퍼지는 것을 보고 면전에서 배척하기를 꺼리지 아니했으며 이를 멀리하기를 마치 더럽힘을 당할 듯이 하였다. 이에 향리로 돌아와 학도를 가르치며 일생을 마쳤으니 그 윤기를 바로잡고 지조를 숭상함은 또한 전형의 계승이자 사법의 전수이다. 예전에는 향리에 청계현사가 있어 공의 부자를 행사하였으나 이내 폐지되어 행하지 아니하고 송강으로 이름하여 남아있던 정자도 또한 중간에 불에 타 무너졌으니 세상이 변하여 물을 수 없어 공의 아름다운 덕이 점점 잊혀져 갔다. 이에 송강정사를 중건하고 그 일헌을 정하여 모송의 편액을 걸고는 때로 모이어 우모하는 장소로 삼았다. 후손 용환이 이에 앞장서 문중에 제의하고 사림이 좇아 계契를 만드니 그 또한 공의公議가 공公을 우모함을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로다. 하루는 용환군이 여러 사람의 뜻으로 찾아와 나에게 기문을 청하더니 나도 함께 연원의 세의가 있다하여 사양함을 용납지 않았다. 또 이 역사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있었고 나의 선인이 처음으로 당장堂長을 맡았으니 비록 내 불초하나 어찌 감히 외면하겠는가? 가만히 이르건대 사문의 흥망은 천수에 있지만 그 실은 또한 인위를 말미암아 생기지 않음이 없다. 사람들의 상언에 현인을 받들고 도를 수호한다고 말하지 않음이 없지만 받든다 해도 그 받음을 볼 수 없고 수호한다 해도 그 수호에 참여함이 없으니 이는 다름 아니라 명분으로써 하고 실행으로 아니 하기 때문이다. 내가 본 바로 근래에 유문의 쇠퇴는 거의 다시 수습할 수 없으니 이른 바 연원도 장차 어느 자리에 의탁할지 알 수 없다. 이것을 어찌 오로지 시운의 불행에만 원망을 돌리겠으며 또한 어찌 일반 나약한 이들이 그 헌사를 담당할 것이겠는가! 정백자가 안락정을 송축하여 말하기를 물을 차마 폐지할 수 없고 자리를 차마 황폐히 할 수 없으니 아! 정학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대저 물과 자리의 폐지와 황폐도 차마 볼 수 없어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단지 정학의 잊을 수 없음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마땅히 이로써 마음에 새겨 모여서 강습할 때는 정학의 잊을 수 없음을 먼저 찾고 평소 실천함에 항상 완악한 이를 청렴히 하고 나약한 이를 자립하게 하는 기상을 친견하듯이 한 연후에 비로소 현인은 받들고 도를 수호하는 실체를 이야기 할 수 있으며 사문에 도움이 되리니 이는 또한 일가 일향의 사업일 뿐만 아니다.
  나는 보잘것없어 대강 그 단서를 말했을  뿐 그 설을 능히 다할 수 없으니 바라건대 동지 제공은 이에 더욱 성찰하여 분발의 결실이 되도록 추구할 것이다.
 
 重建記
山海淵源之盛遍於南方而晋陽其龍門舊鄕也則餘韻所䇒宜有別於他州者有若松岡先生河公親及攝齊之列得與同門諸賢互相切劘以成厥德至其篤於內修嚴於斥邪矢志晦養不求聞達尤是老先生之法門成規然也其子慕松軒公早擧進士見昏朝兇論方張不憚面折而去之若凂退歸鄕里講學授徒以終其身蓋其扶植倫紀高尙志事要亦不替爲典刑之肖師法之傳也鄕舊有淸溪賢祠躋享公父子而旋廢不擧遺亭之名以松岡者亦中經燬壊則世燮之不可問而風徽之漸以邈然矣於是乎重起松岡精舍而規其一軒揭慕松之扁以爲時會寓慕之所後孫龍煥寔提倡宗門而士林從以修契其亦公議之所不可己者歟日龍煥君復以僉意來責余爲記謂余同在淵源之世誼不容辭又是役也巳在今數十年前余先人首爲堂長雖余不肖何敢自外窃嘗謂斯文興廢自有天數而其實亦未始不由人爲以致之人有常言莫不曰尊賢衛道而尊之未見其尊衛之無與於衛是無他以名不以實故也以吾所見比來儒門之潰敗幾乎無復收拾而所謂淵源一脈者將不知寄着在何地是豈專歸怨於時運之不幸而足亦豈一般伈伈俔俔之所可任其斡旋耶程伯子之頌顔樂亭曰水不忍廢地不忍荒鳴呼正學其何可忘夫不而水地之廢荒誠若不忍而所重者顧在於正學之不可忘也耶爲吾人者惟當以此爲心群聚講習先尋正學之不可忘也而平居體驗常若廉頑立懦之於吾親見然後始可言尊賢衛道之實而斯文有賴又非但爲一家一鄕之事運而己余淺蔑無似粗發其端而不能盡其說尙願同志諸公之於此加省而求以振厲之有終云爾   
                                         歲己亥復月上浣聞韶後人金榥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