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한정夏寒亭
하한정夏寒亭

소재지: 함양군
 
하한정 상량문夏寒亭上樑文
이야기하건대 대개 기괴한 바위에 푸른 털은 이미 뿔있는 용의 천길 모습을 이루고 너울거리는 흰머리는 애오라지 볍새가 빌린 한 가지에 고기와 새가 이상한 모습을 본받아 이를 돌이켜 보건대 삼백년이 지난 고향에 제비와 새가 날아 올라 축하를 하니 저 수천 그루의 솔숲에 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때부터 물을 대고 북을 돋우고 하였으니 오직 나의 고향 이니라. 옛날 우리들 어릴적에 고기를 낚고 노닐 때에 가히 어떤 물과 어떤 언덕을 사랑했나니 맑은 위천수는 서쪽에서 흘러와 한 구역을 열어서 맑은 거울을 이루고 지리산은 남쪽을 가리켜서 일만 봉우리 옥녀비녀가 십리을 뻗은 무성한 숲과 서로 바라보면서 구름속의 신선이 철쭉 꽃향기 속에 낚시대를 어루만지며 퇴계선생의 하표遐表가 일찍부터 있듯이 읍揖하고 만나는 곳에 따라 생각나서 도시락으로 위안하니 또한 지극한 즐거움이 있어 마음에 맞는 지팡이와 신발이 먼 곳에 있지 않으니 하필이면 굽혀서 힘 쓰겠는가. 돌아보건대 쓸모없고 흩어져 있는 한 문장에 문득 해질무렵에 미쳐 무너질듯한 경치의 운명이 쇠하여 떨어지니 거의 같이 이른 봄 윤년에 막힌 모퉁이가 여러번이나 세상의 변천을 거쳤으니 재앙이 낀 운수에 난과 창포가 아홉이랑이라. 마음속으로 엉키어 마침내 초나라 상수湘水에 반하고 기국杞菊 몇 두둑이 한가로히 한漢나라 산속에 방해 되지 않으며 오직 늙은 잣나무는 또한 사람들의 사랑하는 수석과 금서琹書의 즐기는 바로써 숨은 노나무는 마땅히 세상과 더불러 잊혀지고 연운烟雲과 사조沙鳥는 하루의 띠집을 지으니 그로 인하여 두칸의 죽루竹樓를 지어서 매양 도팽택陶彭澤의 동수冬秀의 음吟을 읽고 늦은 철을 생각하여 은밀히 왕망천王輞川 하한夏寒의 글귀를 취하니 이에 아름다운 이름을 주어 근심스러운 구름 천장이 엄연히 장사의 둔한 관같이 서있고 만휴萬髹의 풍월을 읊음에 비파와 생황을 연주하기에 옷깃을 헤치고 바람에 서서 어릴적 등을 햇빛에 쪼이여 혼연히 개우치니 헌묘한 이치가 피부에 핍박함을 느끼도다. 필생의 구번邱樊에 맹서하고 빙설로서 지조를 고치지 아니하며 차라리 바위 구렁에서 말라죽을지어정 즐겨 도리桃李와 더불어 고움을 다투리오. 귀신이 고명高明함을 틈내어 어찌 얋게낀 구름과 떨어지는 별의 웅장하고 화려함이 부러우며 땅이 넓으니 상쾌하여 또한 청풍명월의 말비(抹批)가 족하고 좋게 때맞춰 오니 가히 잔을 들어 술자리을 용납하고 좋은 때에 홀로 길을 스스로 따르니 경권經卷과 다로茶爐에 가깝도다. 선롱先壟과 선려先閭가 감히 가로되 비조妣祖로 이어져서 같이 한나무와 하나의 돌을 차라리 자제의 아름답지 못함을 걱정할지언정 얼굴의 평안함을 신뢰하나니 비록 이가 나빠 졌기에 이 섭섭함이 비둘기의 못남이 구충의 숭대를 바라지 못함과 같고 학과 더불어 같이 깃들면서 가히 천세를 기약함이라. 대개 잠간 수레를 멈추고 영착영斮의 노래를 들어보소. 아랑이 들보를 동으로 던지니 맑은 간수 냉냉히 동으로 흐르네. 비파를 당겨서 나는 세사 하고자 하나 솔바람이 동에서 불어오도다. 아랑이 들보를 남에 던지니 춘수는 우리집의 남과 북이라. 그 가운데 백구는 나와도 같이 수연수然히 강남의 꿈을 꾸네. 아랑이 들보를 서에 던지니 집을 찿아 우는 새야. 날이 저문데 저녁 연기 한 아름 어느 곳인지 내집의 가까운 곳 서쪽에 머무네. 아랑이 들보를 북에 던지니 바람소리 주기酒旗는 물 북쪽이라네. 마심을 파하고 그대는 돌아가라. 비로소 한잠 부치니 맑은 바람 북창에 불어오도다. 아랑이 들보를 위에 던지니 한 웅큼 띄집이 머리 위를 덮도다. 나를 부르는데 높은 소나무는 방해되지 않으리니. 흰구름이 찿아와서 난간위에 잠드네. 아랑이 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이슬비에 뽕나무와 삼은 크고 작도다. 들녘의 늙은이 성은을 알거늘 멀리 서울의 해지는 곳 바라보도다. 간절히 원하되 상량한 뒤에 소나무와 같이 무성하여 턔평한 사철에 푸르름이 길이 머물고 베지말고 치지 말라. 한 점의 검은 티끌도 이르지 말고 나에게 가채可採하고 가어可漁하여서 한 곳에 모을지니 이야기는 흡사히 거룩하신 우리 가문 자랑이니라. 군현(群賢)을 모아서 창서暢敍하기에 진나라 때에 난정蘭亭을 사양하지 아니하나니을사乙巳년 국추菊秋에 상한(上澣) 삼송산인(三松散人) 씀.

원계정遠溪亭

소재지: 함양군 도천리
 
원계遠溪는 뇌계惱溪 위에서 흘러 쏟아져서 바라보건대 은연히 성곽 같은 여러 산의 작은 것들이 모여서 한 경계를 이루어도다. 조금 아래 평평한 언덕에 솟은 터는 큰 돌이 편편하여 넓어서 거의 자리를 수십 장을 펼 수 있고 그 바닥의 골짝은 오모한 못이 되어 냇물과 더불어 머금고 토하면서 검프르기에 무엇이 엎친 듯하니 말하기를 이심대理尋坮이다. 이대는 본래에 명승으로 일컫지 않았으나 그 이름이 군지郡誌에 들어났으니 어찌 그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 사람은 누구일까 보냐. 옛 하공 휘일諱鎰이 라는 분이니라. 공은 일찍 이공 병상秉常과 더불어 이곳에 노닌지 이백 여년이라. 전과 다름없이 옛 물건은 타성이 점유하던 바가 아니거늘 어찌 그 사람이 아닐까 보냐. 금년 여름 유월에 공의 칠세손 정식이定植이 비로서 정자를 그곳에 수축할 새 역사役事를 마치기 전에 와서 기현琪鉉에게 이르기를 나선대의 머무르신 자취가 많이 원계정에 있으므로 군자가 이미 영모하는 재齋를 지어 장구杖屨가 반드시 이 대위에 왕래하였기에
선대의 유적을 보존함이었으나 없어지려고 함을 용납지 못하고 드디어 덤불을 치고 걷어내어 이름을 돌에 새기어 새롭게 하고 또 원계동이라 새긴 그 곁에 원계라고 호를 스스로 정하여 오늘날 나의 정자로 하는 바이니 진실로 조선祖先의 터에서 났으므로 그 정인 즉 더욱 어버이 생각이 간절하니라. 자네는 홀로 우리 정자의 이름에 뜻 없이 기문을 쓰겠는가. 나는 가로되 옛날 윤공의 정자는 성으로써 했고 광록光祿의 당은 관으로써 했나니 홀로 공은 자기 호를 원계라 하지 아니했겠는가. 그대가 이르되 내 뜻 이니라. 얼마 안가서 그대로 불행한 하룻밤에 문득 갈 것이거늘 이 어찌 선조를 위하여 그 사자嗣子에게 건 하리오 하니 종철宗澈이 이에 울면서 지붕을 덮어서 기와를 이고 횡함橫檻도 이미 고성告成 했기에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니 슬프다. 그 양대兩代라 어찌 나로 하여금 사양 하리오. 나 이미 곡하면서 시를 지어 이르되 뇌양雷陽 천석泉石 옥수성屋數成하니 탁아託我 위문차爲文且 명명命名이라. 종아위부군부재縱我爲父君不在하니 공량잔월배상정空樑殘月倍傷情아라. 뇌계 양지 돌 위에 정자를 이루어 나에게 부탁하니 기문을 짓고 또한 이름을 짓게 하였네. 가사 나의 아버지와 그대 있지 않으니 속절없는 쇠잔衰殘한달에 갑절이나 정을 아프게 하네. 그대는 아는지 슬프고 슬프도다. 그윽이 생각하니 망루를 짓기로는 그 처음이라.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나 몇 대 뒤에는 언덕의 가시밭으로 변화할 것이어늘 사람의 일인즉 문득 가고 문득 오기에 족히 믿지 못하는 것을 떳떳이 세상에 비유하였으니 그 사람이 가히 참되게 전하지 아니하리오. 이 정자는 그러하지 않음이 있느니라. 앞대의 아름다운 발자취가 이백 여년이나 온전하였으니 양 대의 후덕이 천명되어 선대의 징조가 또한 이 같으니 종철은 또한 이로써 지켜 또한 이 마음으로써 장차 자손에게 전하여 끊이지 않는다면 이는 좋게 전할 보배가 있음이로다. 향하기를 문득 가고 문득 오는 것이 아님이니 정자 이름의 멀원자는 또한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 좌우 산천의 좋은 경치와 하늘과 들과 구름과 연기의 아득한 아지랑이에 고기 잡고 나무하며 장사꾼 나그네의 왕래하는 모습은 가히 노니는 사람의 바라볼 거리를 갖추었나니 나는 궁구한 이론을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기미년 십이월 초일에 하기현河琪鉉 쓰다.
하일河鎰이 이병상李秉常과 풍류를 즐기던 곳에 200년 뒤 원계 하재섭河在涉이 영모재를 지었고 그 아들 하정식河定植이 6대조 일鎰을 추모하여 원계정을 세우고 손자 하종철河宗澈이 완성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