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마을
 
 
운문마을

 
 
소재지: 진주시 금곡면 검암리
 
 
진주에서 남쪽으로 고성 가는 국도를 따라 약 16㎞ 정도 가다가 왼쪽으로 보면, 영천강 너머에 왼쪽 산줄기는 강을 따라 서쪽으로 흘러내리고 오른쪽 산줄기는 강에 막혀 우뚝 선 그 사이로 긴 골짜기가 있다. 구름이 낮게 드리우거나 안개가 짙게 낀 날엔 잘 보이지 않다가, 운무가 서서히 걷히면, 마치 대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집안이 드러나듯이, 골짜기가 드러나고 거기에 아늑한 마을이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다. 운문 마을이다. ‘구름문’이 축약되어 ‘굴문’으로 불리다가 지명을 한자화하면서 ‘운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가지는 거의 없고 밑동만 남아 수령이 족히 500 여년은 됨직한 고목이 이 마을의 깊은 유서를 말해주고 있으며, 마을 중앙에는 역시 수령이 500 여년을 넘을 듯한 정자나무가 있고 그 옆에 만석 거부(巨富) 때 열두 대문 중 두 번째 대문 앞에 놓여 있었다고 하는 돌다리가 옛날의 영화를 말해 주는 듯하다.
 증 문하시랑 동평장사 휘 공진(拱辰)을 시조로 모시는 진양 하 씨가 언제부터 이곳에 마을을 형성했는지는 문적이 없어서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성종실록, 운수당 실기 등 문헌에 의하면, 문종이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한 1452년에 운수당 공께서 이곳 본가에서 탄생하였고, 운수당 아버지 거제현령 휘 계지 공께서 1470년 이곳 본가에서 별세했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운수당 증조 안린 공부터 헤아려도 6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그동안에 진양지나 조선 지리지, 진주 연계안 등의 문헌을 보면 중조 휘 안린 이후 운문에 살았던 진양하씨 후예들의 사적이 많이 실려 있어, 지난날 이곳 선조들의 충효와 학행을 말해 주고 있다.
 마을을 지나 집들이 거의 끝나는 지점에 깊은 골짜기가 있으니, 운수동(雲水洞)이다. 산자락에 운수당과 우봉에서 이건(移建)한 망추정, 시조와 운수당공을 모신 경인사와 율수재가 모여 있고, 그 옆에는 진사 휘 취양 제단과 선계(先系) 모록(冒錄)을 바로잡고자 2003년 종장(宗丈)이신 운당(雲堂) 현식(炫植) 씨께서 세운 선계사재조명 기념비가 있다. 서편 뒤로 산 중턱에 운수당공 묘소가 있고, 묘역에 있는 문인석은 왕가의 하사품인데 둘레가 두 아름이나 되는 거석으로,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이 골짜기는 바로 운문 종사(宗史)의 산실(産室)이며 보고(寶庫)인 셈이다. 이젠 세태의 변천으로 대부분 외지로 나가고, 이 운문 마을을 중심으로 약 백여 호가 집성촌을 이루고 선조들의 유풍(遺風)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