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모재기永慕齋記
본 재실은 처음으로 창건한 것이 곧 명나라 만력 연간이었는데, 선조 영모재공의 묘소가 있어서 그대로 이름붙인 것이다. 공은 임진왜란 당시에 몸을 빼어 청송 땅으로 화를 피하였는데, 난리로 도망 다닐 때에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뜻의 개연한 감회를 읊은 시가 있다. 그 중에 명나라 장수가 왜적을 격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의 마지막 구절에 “조선의 해가 다시 빛나 종묘사직이 편안 하니, 요행히도 난리를 격고 살아 태평한 날이 돌아 왔네" 라고 하였으니 참으로 글자마다 충과분이 서려있다 할 것이다. 다행히도 바다로부터의 전쟁 기운이 막 걷히고 조정의 천명이 새롭게 일어나서 충렬 가문을 찾아 훈구의 후예들을 등용하면서, 청요직의 벼슬 하나를 선대의 음덕으로 이어 받았으니, 성은의 지극함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오던 날에는 척호 시의 서글픈 가족 생각과 육아 시의 부모님을 그리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동서 언덕 선산 옛터에다 몇 칸 재실을 지어서 영모재라 편액을 걸었으니 대개 그 어지신 중조 돈재와 낙포공의 뜻을 추모함이다.
지금까지 300년 사이에 먼 후손들이 변함없이 예전 그대로 이어받아 수리한 것이 몇 번이었다. 옛날에 큰 글자 석자로 쓴 현판이 있었으나, 해가 오래되어 폐지되었으니 어찌 잔약한 후손들이 깊이 개탄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올해 겨울에 동종의 의론을 모아 현판의 호칭을 새로 만들어 걸고 옛 사당에 회칠을 새로 하여 우리 선조 돈재공과 영모재 두 분의 신령을 모시는 곳으로 하였다.
아 아 아름답다! 수 백 년 숨겨진 광채와 덕성을 오늘 제사 모시는 자리에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오래도록 선비들이 우러러보고 후손들이 바라보며 추모할 것이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재력이 없고 힘이 모자라서 묘궁의 제도를 크게 하여 참봉 낙포공과 같이 실제 행적이 있는 분을 두 분의 사당에 함께 모시지 못한 것이다. 이는 곧 후손들의 안타까움이다. 짐짓 판에다 새겨서 후세를 기다린다.
永慕齋記
本齋之創始迺於皇明萬歷年間先祖永慕齋公衣履之所而因以爲號焉公當龍蛇之變挺身逃禍于靑松之地奔迸之際憂國忠君之意漑然有感發詞詠之中而其聞天將破倭有詩 末句云鮮日重光寧社稷幸生怯經晟辰回誠可謂字字忠憤何幸海氣初晴邦命維新搜訪忠烈之家錄用勳舊之裔而一資淸要承襲先蔭聖恩極矣其在還鄕之日慼慼有屺岵之思蓼莪之淚矣遂因東西崗先壟舊址肯構數間齋舍扁以永慕盖追其賢中祖遯齋樂圃公之遺志也逮今三百年之間雲仍之勿替因舊嗣而葺之者至於一再也古有三大字揭號而年久廢閣玆豈非孱孫之深所개恨也哉噫重可慼也今歲冬採同宗議新揭板號丹堊舊廟 行我先祖遯齋永慕齋二公之妥靈有所於平休矣數百餘年幽光潛德複見於今日俎豆之筵久矣多士之景仰展也後孫之瞻慕但恨財殫而力綿不能廣廟宮之制度以參奉樂圃公實行未能幷處於二賢之廟此仍後孫之齎咨也姑爲錄榟以候後世
崇禎後 己未十二月 後孫 叔楨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