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사재기永思齋記
영사재기永思齋記
고 별시위 사과 진산 하공 휘 치천値千의 묘는 진주 서쪽 효자리에 있다. 공은 하씨의 일파조로 어질다고 명성이 난 분이다. 공의 선조는 여조麗朝에 현달하였고 조선에 이르러 더욱 번성하여 광휘가 연이었으니 나라의 명가로 손색이 없었다. 중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씨족이 사방으로 흩어져 고향에 정착하지 못한지라 단지 해마다 한 번 세제를 드릴 뿐 묘도의 꾸밈에 미흡함이 많았으니, 아! 이 또한 운수이로다. 대개 흥망성쇠란 사람이 피할 수 없지만 굽었다가 펴지는 것이 또한 변함없는 이치이다. 이제 후손 중 본주와 각 군에 거처하는 이들은 그 집안이 자못 번창하고 인물이 훌륭하여 족히 그 문호를 일으킬 만하니 어찌 하루라도 선영을 망각하여 선조를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지난해 신축년 후손 동근東根이 대종과 의논하고 효성을 다해 공의 묘하에 새 정자를 세워서 추모하는 장소로 삼았으니 매우 웅장한 재실이다. 이에 비로소 제홀, 제도, 제전, 제기, 제규가 모두 정연히 갖추어졌고 지나가는 이들이 쳐다보며 칭탄하여 공公이 이름 할 바를 묻기에 내 말하기를 “무릇 선조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오직 경건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것은 효도의 근본이요 ,전인前人이 이루지 못한 바를 창설하여 후세에 전하려는 것은 효도의 전파이다. 하물며 마을 이름을 특별히 효자리라 하니 이 재사에 오르는 제족은 효제의 마음이 끊임없이 솟아나 그 선조를 길이 사모하지 않겠는가! 시경에 이르기를 「효를 길이 생각하니 그 효성 본보기로다.」 하였으니 청컨대 그 당을 영사라 편액하고 그 문을 유칙이라 하면 되겠는가!” 하였다. 또 나에게 기문을 부탁하니 내 병으로 답하지 못하였다가 오랜 후 고하기를 “숙정은 눈이 보는 곳에 따라 생각이 따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재사는 겉치레를 벗어나 기리 후세에 전해질 것이다. 천학운립의 아취와 어조 화초의 즐김은 참으로 이 밖의 것이니 재사에 무슨 연관이 있겠는가! 아! 힘쓸지어다.” 라고 하였다. 처음 재사를 구입할 적에 각자 성심껏 부담했지만 제일로 마음을 다해 관여한 이는 태진泰鎭 창진昌鎭이요 맨 먼저 거금을 내어 이를 성사시킨 이는 영환泳煥 재근在根이며 시종 일을 주선하고 나에게 글을 청한 사람은 또한 동근東根이다.
永思齋記
故司果別侍衛晋山河公諱値千之葬在州治西孝子里盖公河氏之一派祖而賢有望者也始公之先顯于麗至聖朝益蕃以衍舃赫相承無愧爲國中名家中世偶多艱氏族散而之四方不能奠故土只歲薦一祭而隧儀多闕焉吁其命也歟盖盛衰汙隆有姓之所不免而屈而必伸亦理之常也今其後裔之居本州及列郡者其族頗閥閱其人多俊乂足以昌大其門戶者也則何嘗一日而忘先壟而不思所以爲追遠報本之道哉임歲辛丑後孫東根協謀大宗殫孝思而經理就公墓下而購新亭爲箸存之室甚傑閣也於是乎祭笏祭圖祭田祭器祭規皆井井有備而東西過者莫不指點羨嘆以爲公積德之報也吁其盛矣哉旣而問所以名其齋者余曰凡祭先祖而惟恐不虔孝之道也刱前人所未遑而欲傳之無窮孝之推也矧其里名特稱曰孝子則諸族之登斯齋者孝悌之心安得不油然而生而永思其先祖乎詩曰永言孝思孝思維則請顔其堂曰永思其門曰維則可乎又問記於余余病不能言久乃復之曰甄亭不云乎目之所視而思從之見林木則思春雨之潤見祭田則思吉蠲之饎齋宿焉思如見臨祀焉思祗肅及夫餕訖而退思講信修睦責諸子諸孫思敎以義方則庶斯齋之不虛爲標榜而永有辭於來古矣若泉壑雲林之趣魚鳥花卉之樂則固外也於斯齋何有哉嗚呼其勉矣哉其始之購傑閣也各自血肩而擔之而最實心相與者泰鎭昌鎭也首先出鉅貲而成之者泳煥在根也始終敦事而請余文者亦東根也
                                         歲丙午病月中澣 鄕後生 河禹善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