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월정기霽月亭記
제월정기霽月亭記
진양에 옛날 성균 진사 하협河悏공이 있었으니, 천성이 독실하고 명가이라 학문과 행실을 겸비하였다. 뒷사람들은 그가 살던 곳을 따서 단지丹池 선생이라 하였고, 오늘날까지 고을의 선비로 우대하여 반열에 올린다. 앞서 선생이 남긴 글과 실기를 전년에 이미 세상에 간행하더니, 이제 그 후손이 또 그 분이 살던 마을에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고자 재실에 편액을 하기를 ‘제월정’이라고 하니, 당시의 여러 현인이 선생을 두고 ‘맑은 시내 정자에 비 개인 달이 떴구나霽月’라고 일컬은 말에서 따 온 것이다. 달이 하늘에 뜨면 그 빛을 우러러 보지 않는 이가 없는데, 그것이 비가 개인 뒤이니 신선하고 정결하고, 더욱이 생생한 빛이 한층 좋아서 옛 현인이 그것을 형용하기를 ‘도가 있는 기상은 오직 이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했으니, 선생이 이런 칭호에 해당한다면 그 기상을 가히 상상해 볼 수 있겠다.
 이보다 앞서 공이 돌아가시자 진주동쪽 동지산에 장례하고, 후손이 공을 위하여 재실을 단동 지내에 두고, 이름을 원모재遠慕齋로 하여 마련해 두더니, 세월 지난 지 이미 60년 쯤 근세에 이르러 다시 새로 분암墳菴을 동지東旨에 짓고 원모재라는 현판을 옮기고, 이름을 바꾸어 단지동 옛 재실을 지금의 제월정으로 바꾸어 편액하니, 향토의 사림이 좇아서 계를 모아 회원을 모으고, 우러러 사모하는 정성을 신장시켜 공의 명성이 이에 더욱 높아졌고, 선인의 미풍美風을 잇는 후인이 있어서 또한 장차 영원토록 끊어지지 않을 것이니, 아! 또한 선하지 아니한가. 내 선대는 진주 사람이라서 공의 명성을 이어 들어서 모든 것을 같이하려 했고 사림이 경모하는 날에 참여하여 청하고 또 고하여 말하기를, 공의 명성과 실사의 중요함은 아득히 3백 년 전이지만 역대 현인들의 저술을 한 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진실로 그 도를 구한즉 인륜의 일상적인 상례를 넘지 아니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남이 마땅하였다. 이제 공을 사모하여 배우기를 원한다면 또한 이를 생각하여 그 맡은 바를 다하여 힘쓸 따름이다.
 옛날 점필재 김선생이 한훤당 김 선생께 「소학」한 부를 주면서,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光風霽月이 모두 이 가운데 있다고 하였는데, 대개 우리 유가儒家의 가르침이 원래 광풍제월과 같으니, 처음부터 높고 먼 허공을 바라볼 수 없다면 가히 친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제월정이란 편액에서 이것을 밝히니, 제공의 착한 깨달음을 알지 못하고서야 다시 어떤 말을 하리오?
 나를 찾아와 기문을 지으라고 한 사람은 공의 후손 정근이다.
                                 임진년1952 음력 5월 하한 문소 김황 근기
霽月亭記
晋陽舊有成均進士河公諱悏篤生名家,學行兼備後人因其所居稱號丹池先生至今具列于鄕之儒先先生遺文實記前年己刊行于世今其後孫卽又其故里而扁齋以表寓慕其曰霽月取當時諸賢稱先生有潚灑溪亭霽月之臨語也月之出天莫不仰其光明而其在霽後新鮮淨潔尤好一倍生色所以昔賢之形容有道氣象惟此爲最善而先生乃當此稱則先生之氣象可想見也先是公歿而葬州東東旨山後孫旣爲公置齋丹池名以遠慕用備歲時具修者己六十許年逮至近歲乃復新起墳菴東旨而移遠慕之名名之改扁丹池舊齋以今號鄕省士林從之修契聚會以伸景慕之忱則公之名於是益尊而流風餘韻之屬在後人者且將悠遠而無歇矣吁不亦善夫余先世世爲晉人由是襲聞公聲猷甚悉而與爲士林景慕之日請且諗之曰惟公名實之重蔚然三百年上而歷世諸賢之述可一按而知也苟求其道則不越乎人倫日用之常出處進退之宜在今慕公而願學焉者亦惟卽此而盡其所當爲力而己昔佔畢齋金先生授寒喧堂金先生小學一部而曰光風霽月都在此中蓋吾儒法門 元自如此初非高遠虛空可仰而不可親者也今於霽月之扁而以是爲賛未知諸公善喩 更以爲如何也索余爲記者後孫貞根也
                                          歲玄黓執徐扐夏下澣聞韶金榥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