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원재기追遠齋記
단목은 우리하씨 오백년 세장이요, 진주의 한 명촌이다. 남으로 향하여 십리가 못되는 지경에 있으니 봉우리가 수려하고 남강은 그 밑으로 돌아 낮과 밤
으로 동으로 흘러가고 좋은 마을이 있으니 송곡이다. 산을 등지고 물을 가까이 하여 풍속이 순박하여 은사의 살 곳이 마땅하다. 우리 방 선조 단지 하선생의 첫째 아들의 칠세손 휘 경우가 두 아들을 거느리고 단목으로부터 여기 와서 산 것은 그 뜻을 돌이켜 생각건대 물에 고기 잡고 산에 나무하고 밭 갈고 글 읽어 성품을 잘 기루었던 것이다. 자손들이 모두 어질고 명민하여 능히 조상의 발자취를 이어 문호를 수립한지 어언간 오륙대가 되었으매, 하루라도 그 할아버지 휘 진오 공과 지범 공 양세를 위하여 집하나 지을 것을 생각한바 아니함이 없으나 힘이 약하여 이루지 못하였다가 지나간 해 무진년에 여러 후손들이 협력하고 의논하여 사칸 집을 계획하여 송곡의 양지 편에 지으니 제도와 규모가 검소하고 사치한 것이 적중되어 족히 우모하고 재계하고 학업을 연구할 장소가 되었으므로 이름을 추원재라 한 것은 선조를 추모하고 근본을 갚는 도리의 뜻을 쓴 것이다.
금년 신미년 봄에 후손 성식이 나의 계산 정사에 와서 나에게 기문을 묻거늘 감당 할 수 없다고 사양하여도 사양한 뜻을 얻지 못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지금 서구의 풍조가 동방에 범람하여 우리 옛날의 예속을 무찔러 없애 버린즉 뜻있는 선비들이 뉘가 탄식하고 슬퍼하지 아니하였으랴. 오직 여러 일가들은 그런 풍조에 빠지지 않고 능히 할아버지를 존모하고 일가들과 화목할 도리를 알아 이루었으니 진실로 말세에 성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으로서 능히 일을 다 하였다고 하지 말고 여기에 일가들을 모아 반드시 화목한 정의를 이룰 것을 강론하고 또 수호하며 가히 추원보본의 도리를 다하였다고 할 수 있고 이재실의 수명 또한 무궁할 것이니 어찌 서로 더불어 힘쓰지 아니하랴.
세 민국 신미사월중순 족손 성균관전의 동근 근기
追遠齋記
丹牧 吾河五百年世庄 而晋之一名村也向南未一舍地峯巒秀麗 籃江走其下日夜東流窈奧爲村者日松谷背山臨水人俗淳厚政宜隱者考槃之所也我傍先祖丹池河先生 長房七世孫世孫諱慶宇率二子自丹奠居于此者抑其義利於漁樵耕讀養性故也子姓皆俊乂明敏克繩祖武樹立門戶者於焉五六世而無日不思所以爲其祖諱鎭五之範兩世肯構之事也力綿未遑往歲戊辰諸後孫協謀築五楹四架屋于所居松谷之陽制度規謨儉奢適中足爲寓慕吉益蜀肄業之所而扁曰追遠者用追遠報本之道也今辛未春後孫聖植造余桂山精舍問記於不佞不敢當辭不獲曰顧此西潮汎濫東土夷我舊日之禮俗則有志之士孰不爲嗟嘆哉惟諸族不陷其臼而能知尊祖睦族之道念祖修德會族講信成此傑閣寔爲叔季之盛事也莫以是爲能事畢齋宿於斯祭必致如在之誠會族於斯 講必致敦睦之誼及夫守護之事隨毀修補則可以爲盡追遠報本之道而斯齋之壽同其無窮矣盍相與勉旃
歲民國辛未四月中旬族孫成均館典儀東根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