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석성문기矗石城門記
예로부터 성대聖代와 난세亂世가 순환循環하는 것은 대개 천운天運의 성쇠와 인사人事의 득실이 서로 원인이 되어 그런 것이다. 옛 사람은 인사人事를 다 수행修行하고 천운을 기다렸으므로, 혹 환란患亂이 일어나더라도 끝내 우환憂患꺼리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우리 고을의 성곽을 보고 느낀 것이 있다.
옛적 내가 총각總角 시절에 이곳에 공부하러 왔었는데, 매양 성참城塹의 옛터를 보고 그 설치 연대를 알지 못하여 노인들에게 물어도 역시 징빙徵憑할 수 없었다. 그때는 마을이 평온하여 연화煙火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간혹 왜구倭寇가 침범해도 강주康州 길안吉岸 벌이 막아내기에 충분하였으며, 합포진合浦鎭에서 군사를 나누어 구원했는데 우레처럼 힘차고 바람처럼 빨랐으니 사람들이 성참城塹의 수리修理가 급한 일인 줄 몰랐다. 내가 성인成人이 되어 벼슬길에 오른 지 10여년에 왜구가 내침하여 육지까지 오르는 것이 해가 갈수록 심해지더니, 정사丁巳1377년 가을에 묘정廟廷에서 변경의 방비를 단단히 할 것을 의논하고 여러 도道에 사신使臣을 보내 주현州縣의 성곽을 수리하게 하였다. 우리 고을 사람들도 곧 구기舊基를 흙으로 보축補築하였으나 오래 가지 못하고 잇달아 다시 무너지니 사신使臣이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기미己未1379년 가을에 지금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인 배공裵公이 강주진康州鎭에 내려와 목사牧使에게 이첩移牒하여 다시 수리하게 하고 참좌參佐를 보내 그 일을 감독하게 하여 흙을 돌로 바꾸는데, 일이 반쯤도 진척되지 않아 왜구에게 함락되고 고을 사람들은 강성군(현 산청) 산성에 의지하여 왜구의 선봉先鋒을 물리쳤다. 그러나 성이 협소하고 높은 곳이라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없었고, 또 주州에서 거리가 멀어 갑작스런 형세에 대처할 수 없었다. 왜구가 물러간 뒤 목사牧使 김공金公이 백성들의 원정願情으로 나와 영을 내려 말하기를, 이제 수리를 마칠 수 있다 하니, 들은 자들이 모두 그 일에 자원하였다. 이에 장정들이 그 일을 골고루 맡고 목사가 몸소 감독하여 며칠 안 되어 마쳤다.
성城은 둘레가 800보步, 높이가 두 길 남짓하다. 성문은 셋인데, 서문西門은 의정문義正門, 북쪽은 지제문智濟門, 남쪽은 예화문禮化門이니 무두 그 위에 문루門樓를 세웠다. 이에 올라 사방을 돌아보면, 청천菁川이 서쪽에 둘러있고 장강長江은 남쪽으로 분주히 흘러가며, 품자品字 모양의 해자垓字가 동쪽에 벌여 있다. 세 연못이 그 북쪽에 모여 있으며 또 성과 못 사이에 해자를 팠는데 서쪽에서 동쪽에 이르고 다시 꺾이어 남쪽으로 향하여 강에 이르니, 형세의 뛰어남이 참으로 일당백一當百의 요새要塞이다. 성城이 완성되니 왜구가 다시는 접근하지 못했고, 한 지방이 이에 힘입어 편안해졌다.
오호라, 처음 만드는 것이 어렵지만 다시 일으키는 것이 더욱 어려우며,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만 끝마치기가 더욱 어렵다, 일은 반半 정도밖에 안 되지만 공功 드는 것은 배倍가 되는 것을 내가 김공金公에게서 보았다. 공公의 휘諱는 중광仲光으로, 정무政務를 행함에 대체大體에 힘쓰니 장자長者의 풍도風度가 있고, 일찍이 제주濟州 목사牧使가 되어 그곳의 반측反側하는 습속習俗을 정의正義로써 굴복시켰다. 조정에 돌아와서는 재상宰相이 되어 그 어려운 일을 능히 해냈으므로 이 일을 맡은 것이다. 판관判官 이임충李任忠 또한 품행이 바른 사람으로 공公을 도와 일을 완성했다.
矗石城門記
自古以來理亂循環盖其天數之盛衰人事之得失相因而然也古之人修人事以應天數故寇亂或興而終莫能爲患也余於吾鄕之城有感焉余昔總角之日遊學于此每見城塹之遺基不知其歲月問之耆舊亦莫徵當時閭閻熙熙烟火相望海寇之鼠竊者雖或間發康州吉岸之伐亦足以摧挫而合浦之鎭分兵相救若雷勵而風飛然人不知修城塹爲急務也余旣冠從宦十餘年來冠之登陸者歲益湥在丁巳之秋廷議重備邊遣使諸道分理州縣之城鄕人即舊基築以土不能經久隨復頹圯奉使者豈得辭其責己未秋今知密直裵公來鎭康州移牒牧官俾復修之遣參佐督其役易土以石功未半而寇陷頼江城郡之山城一鄕人有所依據得以却寇鋒然城狹而高不能以容衆又去州理遠倉卒勢不能及寇旣退牧使金公因民情而出令曰州之城今可以畢修矣聞者咸願爲之役於是丁均其役躬自監督不日而畢域周八百步高三仞有奇置門三西曰義正北曰智濟南曰禮化皆樓其上焉登而四顧則菁川繞于西長江奔于南品字隍列於東三池匯其北又開塹于城池間自西而東折而又南以至于江形勢之勝固可以一當百矣城旣成矣冠不復敢近而一境賴而安鳴呼作之之難不如興復之爲難有始之難不如有卒之爲尤難也事半而功倍者余於金公見之矣公諱仲光爲政務大體有長者風嘗爲濟州牧反側之俗服其義及還朝宰相以能理劇擧故有是任判官李君任忠亦端人也助公以成
晉山 河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