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본재기報本齋記
보본재는 우리 4대조 이하의 조선을 한 해 한 번 제사를 올리는 청사이다. 옛적에 나의 선군자께서는 이제까지 서두르지 못한 모든 종사에 마음을 다하여 정리하셨고, 조상을 받드는 범절에는 더욱 애를 쓰셨다. 일찍이 중부와 계부 및 종숙부와 의논하기를 승냥이나 수달도 근본에 보답 할줄 아는데 사람이 되어서 그만 못하여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이에 문서를 만들어 재물을 불렸다. 전심으로 모은 지 수십 년 만에 조금 넉넉해지자, 제전 한 구역과 분암 몇 칸을 설치하여 오래도록 지켜갈 수 있도록 도모하였으나, 지난 병진년에 선군자께서 불행히도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시고 종숙부와 중부께서도 또 차례로 돌아가셨다.
아아 일을 이루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사람의 일이 변하는 것이 이렇게 쉬운 것일까?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여 조상에게 보답하는 책임은 불초에게 있는지라, 이에 올해 초봄에 두곡정 동편에 터를 살피고는 공사를 시작하여 4개월 만에 공사를 마쳤다. 이에 보본재가 비로소 우뚝 서게 되었다. 낙성하는 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픔을 그칠 수 없었다. 이 재실의 완성이 선군자의 시대에 이루어지지 못하고 금일에 와서야 창건된 것은 그 또한 때를 기다림이 있어서일까.? 돌이켜보면 못난 불초로서는 감히 선인의 뜻을 계승하여 지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으나, 오직 대충 완성한 점은 있다.
아아 선군자께서 효성으로 추모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근본에 보답 할 수 있었겠으며, 선군자께서 근면 검소하게 기초를 넣지 않았다면 또 어떻게 재실을 지을 수 있었겠는가? 무릇 조상을 존중하는 데는 제사보다 더할 것이 없고 제사에는 정성과 공경보다 더할 게 없다. 정성과 공경이 아니라면 비록 사당의 모습이 아무리 크고 제기를 모두 갖추었다 하더라도 단지 의식 절차의 말단일 따름이요, 어찌 근본에 보답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날의 군자들은 반드시 여재의 정성을 극진히 하여 죽은 이 섬기기를 산이 섬기듯이 하고 사라진 이 섬기기를 남아있는 이 섬기듯이 하였으며, 고향의 나무를 보고는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비와 서리가 내리면 서글프고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나 공경하지 않는 물건이 없고, 추모하지 않는 때가 없어서 혹시나 함부로 하거나 태만히 하는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선군자의 뜻으로 후세 사람들에게 바라던 바였다. 오직 바라건대 우리 조상의 후손된 자는 선군자의 마음을 가지고 아침저녁 게을리 말고 변함없이 지녀서 가까이로는 편안하게 지내려는 생각을 버리고 멀리로는 지켜가기 어려움을 염려하여. 여기서 화목을 돈독하게 하고 여기서 사랑하고 공경한다면, 거의 이 재실의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신미(1931) 가을 7월 보름 주손 승운 기
報本齋記
報本齋者 吾四世祖以下 歲一供祭之廳舍也 昔我先君子 凡宗事之未遑者 麻不殫心綜理 而尤拳泰於奉先之節 嘗與我仲季二父 及從叔父謀曰 彼豺獺猶知報本 可以人而不如乎 乃立券殖貨 專心拮据 至累十年而稍羨思欲置祭田 一區 立墳菴數間 以爲久遠之圖 而粤歲丙辰 先君子不幸志未就而見背 從叔父曁仲父 又次第不淑鳴呼 事之成若是其難 而人事之變 若是其易歟 其所以述父志 而報祖先者 責在余不肖矣 迺於是歲之孟春 相地於杜谷亭之東 經始齋役 閱四個月而工告訖 於是焉 報本齋始巍然矣 旣落之日 風樹之痛 尤有所不能自己者 斯齋之成 不於先君之世 而刱造於今日者 其亦有待而然歟顧不肖蔑裂非敢曰肯構 而惟苟完則有之矣 噫 不有先君之誠孝而 遹追之 則夫安有本之可報乎 不有先君之勤儉而基礎之 則又安有齋之可作乎 夫尊祖莫如祭祀 祭祀莫如誠敬 非誠敬 則雖廟貌孔碩 籩豆己具 特儀文之末而己 曷可謂之報本也哉 是故 古之君子 必盡如在之誠 事死如事生 事亡如事存 見葉桑梓而加恭敬之意 履雨霜而有愴怵之心 無物不起敬 無時不寓慕 罔或瀆慢 此先君之志 而所望於後人者也 惟願爲吾祖之後孫者 以先君之心爲心而 早夜匪懈 勿替引之 近捨宴樂之安 遠慮守成之難 敦睦於斯 愛敬於斯 則庶無愧乎斯齋之名矣
辛未1931秋七月旣望冑孫升運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