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강재기東岡齋記
동강재기東岡齋記
 
 하표진군이 그 일족 영기를 통하여 내게 서찰을 보내어 말하기를 나의 선조 증 한성부좌윤 휘 수창의 분암으로 동강재라 하는 곳이 있어서 대한민국 신축이월에 완성되었는데 그대가 기문을 지어주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내 오래 전에 영기씨를 통하여 밀양의 대항 하씨의 문헌이 성대하다고 들었다. 이제 서찰을 살펴보고는 그 본디 근원이 실로 좌윤공으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알았다. 좌윤공은 효우와 문학에 독실하였다. 이를 자손들이 이어받고 가법으로 삼아서 가업으로 계승하는 데 항상 힘썼다. 이 재실로 말하자면 공이 돌아가신 지 240년 사이에 어찌 참으로 지을 만한 기회가 하루라도 없었을까? 돌이켜보면, 묘소아래 가까이 살면서 아침 저녘으로 쳐다보고 절하면서 마음속으로 애연한 마음이 일어나 세대가 점차 바뀌고 멀어지는 줄도 몰랐으니, 비록 예제가 야제 이기는 하였지만 집집마다 재숙하는 곳이 되고 사람마다 제사를 받들려는 책임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참으로 특별히 재실을 갖출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천하가 어두운 밤이 되고 백성들의 삶은 이산離散의 극치에 이르렀다. 하씨 집안에서는 이를 두려워하여 마침내 건물을 갖추는 일을 서둘러 온 가문의 뜻과 생각과 이목을 한곳에 붙들어 놓았다. 대개 동강은 공의 묘소가 있는 산인데 재실을 짓고 그 묘소가 있는 산의 이름을 붙인 것은 공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재실에 다른 표방은 없고 오직 중당을 염수라고 하였는데 시경의 말을 인용하여 공의 덕성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서로 맹세하기 위함이다 무릇 능히 공의 모습을 나타내고 서로 공의 덕성을 더럽히는 일이 없도록 맹세 하는 것, 장차 잘 계승해 나감에 있어서 이보다 더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서찰을 통하여 글에 적힌 것 외에 이 재실을 지은 의도를 알고 이로써 하씨 집안의 문헌이 아직도 시들지 않았음을 짐작 할 수 있었다 이에 특별히 표출하여 기록함으로써 내 글이 구차하게 지은 것이 아님을 나타내거니와 그 칸수가 규모, 체제 및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공사에 달려든 내용은 서찰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나열하지 않았다.
을사 1965년 7월  일
                                                          재령 이일해 기
東岡齋記
河君杓鎭 介其族永箕 致狀於余曰 吾先祖 贈漢城左尹 諱 壽昌 墳菴有所謂東岡齋者 成於民國辛丑二月 請子惠而爲之記 余嘗因永箕 聞密州大項河氏文獻之盛久矣 今按狀 知其本源 實由左尹公始昉 盖左尹公之行 篤於孝友文學 而子孫襲以爲家法 凡事 常務繼述 卽以是齋言之 自公沒二百四十載之間 豈誠無一日可作之會耶 顧以居近塋下朝夕瞻拜 僾然心目 不自知其世代之寢運而寢遠 則雖禮制歸于野祭而家家爲齋宿之所 人人懷奠奉之責 方此時 固無事於別具屋舍也 然今則天下長夜 而民生極其離散矣 河氏爲是惧焉 遂汲汲具屋舍 擧一門志意視聽 而繫之于一處 蓋東岡公墓山也 齋之而名其墓山 所以象公也 齋無它標題 惟中堂 顔以念修 所以引詩之語 而相矢無忝公德也 夫能象公而相矢無忝公德 將爲繼述之善 何以加此 余於狀得是齋作之之幾於文辭之外 有以卜河氏文獻其猶未艾也 玆特表而記之 以見余文之不苟 而如其間架規制 及諸人合力赴功之述 狀自備矣 故不列焉
                                                乙巳七月上澣載寧李一海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