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회루기慶會樓記
경회루기慶會樓記
 금상太宗 13년1413년 봄 2월에 경복궁 제거사提擧司가 후전後殿 서쪽 누각이 기울어져 위태롭다고 의정부에 보고하여 전하께 아뢰니 놀라 탄식하며 말하기를, 경복궁은 우리 선고先考께서 창업하신 초기에 지은 것인데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하시며 행행行幸하여 보시고, 누각이 기울어진 것은 땅이 윤습潤濕하여 기초가 단단하지 않은 탓이다 하셨다. 이에 공조판서 자청子靑 등에게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농사철이 임박하니 마땅히 유휴遊休자를 부려 급히 중수하라 하시었다. 자청 등이 지세를 살펴 조금 서쪽으로 옮기고 그 기틀에 제도를 약간 넓혀 새롭게 하였다. 또, 그 땅이 윤습한 것을 염려하여 누각을 둘러 연못을 파서 완공하였다. 이에 임금이 행차하여 올라가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나는 예전대로 중수코자 한 것인데, 구제舊制보다 지나치지 않느냐 하시었다. 자청 등이 부복하고 대답하기를, 신들은 후일 또 기울어질 것을 염려하여 이와 같이 했다고 하였다. 이에 종친宗親, 훈신勳臣, 기구耆舊들을 소집하여 더불어 즐거워하시며 누각의 이름을 경회루라 하시고, 신臣 하륜河崙에게 명하여 기문을 지으라 하시니, 감히 문사文辭가 졸렬하다고 사양할 수가 없었다.
 신이 일찍이 듣건대, 노나라 애공哀公이 정사政事를 물으니 공자孔子께서 대답하기를 정사政事는 사람을 얻는 데 있다고 했다 한다. 대체로 임금의 정사政事는 어진 인재를 구求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니, 인재를 얻은 뒤에라야 ‘경회慶會’라고 말할 수 있다. 삼가 생각건대, 태조 강헌 대왕께서 성신聖神과 같은 문무文武의 덕으로써 동방東方을 편안하게 하니 천자가 국호를 조선이라 내렸다. 드디어 화산華山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궁전을 지어 근정전勤政殿이라 하며 또 그 문을 근정문이라 이름 하였으니, 그 까닭은 나라의 근본은 지성至誠해야 한다고 여긴 때문이다. 이제 우리 전하께서 선왕의 덕을 본받아 보위寶位를 이어받으시고 대국大國 섬기기를 더욱 공경히 하시니 천자가 고명誥命을 하사하였으며, 정사政事를 공정하게 하여 나라가 편안해졌다. 이제 한 누각을 중수하는 데에도 오히려 농사철이 임박한 것을 염려하여 일이 없는 자를 부려 얼마 안 되어 준공하였으며, 또 누각 이름을 경회루慶會樓라 하였으니, 대체로 한가한 틈에 여러 신하 가운데 도덕을 갖추고 정사政事의 대체를 아는 자를 초빙하여 도의를 강론하고 건의建議를 받아들여 정치의 근본을 바르게 하려는 것이니, 더욱 전하께서 참으로 정사政事에 근면勤勉하는 본의本意를 엿볼 수 있다.   신臣이 가만히 생각건대, 일찍이 경회慶會를 논한 것은 군신君臣이 덕으로써 서로 만난 것이니, 마치 주역 건괘乾卦의 구오효九五爻가 그 큰 덕으로써 구이효九二爻의 큰 덕을 만나 지기志氣가 상합相合하여 그 도를 행하면 여러 어진 인재가 등용되어 나라가 번영할 것이니, 소위 구름이 용龍을 좇고 바람이 범을 좇는 격이다. 만약 그 덕의德義를 닦지 않으면 여러 사악한 무리가 나와 나라가 어지러울 것이요, 간간이 덕 있는 자가 나오더라도 그 재목을 다 쓰지 않고 여러 사악한 무리들과 섞어 쓰게 될 것이니, 역시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말 것이다.
 옛날 역사를 살펴보면, 요堯, 순舜, 우禹, 탕湯과 은나라 고종高宗, 주나라 문왕文王, 무왕武王이 다스릴 때, 고요皐陶, 기夔, 익益, 이윤伊尹, 부열傅說, 여망呂望, 주공周公, 소공召公이 보필輔弼한 것은 참으로 경회慶會라 말할 수 있고, 한나라 고조高祖에 소하蕭何, 조참曺參과 당나라 태종太宗에 방현령房玄齡, 위징魏徵과 송나라 태조太祖에 조보趙普 역시 경회慶會라 이를 만하지만 덕이 순진純眞하지 않으니 삼대三代와 비교할 수 없다. 한나라 무제武帝에 공손홍公孫弘과 송나라 신종神宗에 왕안석王安石은 또한 서로 만났다고 할 수 있으나 거짓을 꾸며서 이름을 낚았다는 기롱譏弄과 크게 간사한 것이 충성처럼 보였다는 비난을 오히려 면할 수 없으니 어찌 경회慶會라 하겠는가? 또, 당나라 현종玄宗에 송경宋璟, 장구령張九齡과 송나라 진종眞宗에 구준寇準도 서로 만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현종은 이임보李林甫를 상신相臣의 후계後繼로 삼았고, 진종은 왕흠약王欽若을 섞어 등용하였으니 청탁淸濁과 선악善惡의 구분도 못하였는데 하물며 경회慶會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보면 임금과 신하가 경사스럽게 만나는 것이 예로부터 실로 쉽지 않음을 많이 보게 되고, 다행히 천년에 한 번 만나게 되면 그 즐거움이 어떠하겠는가? 오직 우리 태조께서 근정勤政을 나라의 근본을 삼아 다스렸고, 전하께서 또 경회慶會로써 정사政事를 근면히 하는 근본으로 삼고 힘쓰니, 나라 다스리는 법을 창설한 것도 아름답거니와 선왕의 뜻을 잇는 일도 좋다.
 아, 위대하도다! 그 능히 삼대三代의 경회慶會를 본받고 삼대三代의 치세治世를 이룩하여 착한 법을 후세에 전하고 복록을 무궁하게 누릴 것을 알 수 있다. 대저, 산봉우리는 기이하게 빼어나고, 동산과 연못은 그윽하고 깊었으며, 빙설氷雪의 차가운 기운은 궤안几案에 감돌고, 강호江湖의 불빛은 난간과 마루에 이었으며, 송백松柏은 울창하고 백화百花는 난만한데 풍연風煙과 운월雲月이 아침저녁으로 변화하는 경치는 이루 형용하여 말할 수 없다.
 이제 이 누각을 다시 중수하는 것이 나라 다스리는 것과 같음이 있으니, 기울어진 것을 바로잡고 위태로운 것을 편안하게 하는 것은 선왕의 유업을 보전함이요, 흙을 단단하게 쌓고 연못을 깊이 파는 것은 그 기반을 굳게 함이며, 동량棟梁과 주석柱石을 크게 하는 것은 중임重任을 지는 데에 작은 것으로 할 수 없기 때문이요, 문설주와 문지도리를 알맞게 하는 것은 작은 것을 맡는 데에 큰 것을 쓸 수 없음이며, 마루를 높고 시원하게 하는 것은 총명을 넓히는 것이요, 층계를 높게 하는 것은 등위等位의 위엄을 엄정하게 하는 것이며, 아래를 내려다보면 두려운 것은 경외敬畏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 것이요, 멀리 빠짐없이 보는 것은 먼 변방까지 포용하는 것이며, 제비가 오르내리며 하례하는 것은 백성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파리가 오지 못하는 것은 간사한 무리가 물러가는 것이며, 단청을 하는 데에 사치하지 않는 것은 문물제도가 중용을 취한 것이요, 때때로 관광觀光하는 것은 문무文武의 도를 늦추고 펴는 것이 적의適宜함을 뜻한다. 진실로 이 누각에 오르내릴 때 이런 생각을 가지고 모든 일을 적중適中하게 시행하면 이 누각의 이로움이 적지 않을 것이기에 감히 이것으로 기문記文을 삼는 바이다.
慶會樓記
殿下之十三年春二月景福宮提擧司以其後殿西樓傾且危報議政府以聞  殿下驚歎曰景福宮我先考創業之初所建今遽若是歟遂幸而觀之曰樓之傾地潤而基不固也乃 命工曹判書臣子靑等曰農時向近宜役遊手者亟修之子靑等度地移之小西因其基稍廣其制而新之又盧其地潤環樓而池焉旣成矣乃幸而登臨之曰予欲仍舊而修耳無乃過於舊制乎子靑等俯伏而對曰臣等恐後日又且傾危故至如此於是召集親勳耆舊而與之爲樂名樓曰慶會仍 命臣河崙爲記臣不敢以文拙辭臣嘗聞孔子對哀公之問曰爲政在人盖人君之政以得人爲本得人然後可謂之慶會矣恭惟 太祖康獻大王以聖文神武之德嘉靖一方天子賜國號朝鮮遂定都于華山之陽乃違宮室以勤政名殿且以名門其所以爲有國之本者至矣今我 殿下克肖其德纘承丕緖事大益虔 天子錫之誥命治教休明境內乂安今修一樓尙慮農時之近役以遊手者不日有成且以慶會名之盖欲以淸燕之暇引見羣臣之有道德而識治體者察納謀猷講論道義以正出治之源尢有以見 殿下眞知勤政之本矣臣竊嘗論之慶會者君臣之相遇以德也有若乾之九五以其大德利見九二之大德志同氣合以行其道則羣賢類進而國家明昌所謂雲從龍風從虎者也若不以其德則羣邪類進而國家晦暝矣間有以德而進者用之不盡其材雜之以羣邪則亦於晦暝同歸矣稽之前古堯舜禹湯高宗文武之爲治皋夔益伊傳呂周召之爲輔則眞可謂慶會矣若漢高之蕭曺唐宗之房魏宋祖之趙普亦可謂慶會矣然不純於德可能肩於三代哉至若武帝之公孫弘神宗之王安石亦可謂相遇矣飾詐釣名之譏大奸似忠之誚尙不能免矣何有於慶會哉又若玄宗之於宋璟張九齡眞宗之於寇準亦不可謂不相遇矣代之者林甫而雜之者欽若涇渭之分薰蕕之辨尙不敢望況以慶會言之哉以是觀之則君臣慶會從古以來實未易多見矣幸而千載一遇焉則其樂爲何如哉惟我 太祖旣以勤政爲有國之本而治之矣  殿下又以慶會爲勤政之本而懋之刱垂之美繼述之善吁盛矣哉其能追三代之慶會致三代之治效以貽謨於永世享景福於無疆者端可知矣若夫山岳之寄秀園池之窈湥氷雪生乎几案江湖接於軒墀松柏之薈蔚花卉之敫榮風烟雲月朝暮陰晴之景物在乎觀覽之間者不敢形容之悉矣第其樓之興復有類於爲國焉傾者以正危者以安保先業也築土以密除潤以深固丕基也樑棟柱石之欲其壯負重者不可劣也欂櫨椳楔之取其備任小者不可大也敞軒楹廣聰明也峻階梯嚴等威也不臨必悚尊敬畏也遐瞻不遺尙包荒也燕之相賀人民悅也蠅之不止讒邪去也繪晝不侈制度文爲之得中也觀遊以時文武弛張之適宜也苟於升降之際有是思焉而以之施焉則樓之益誠亦不小矣敢以此幷記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