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복당 중건기來復堂重建記
내복당 중건기來復堂重建記
 
나의 종 선조 각재 하선생께서 가정 무술년에 탄생하셨으니 곧 조선 중종 삼십삼년이다. 의표가 헌정하고 지혜롭고 총명하여 글을 배우면서 번거롭게 재촉하지 아니하여도 날마다 수권의 글을 외우시니 아버님 풍월헌공이 심히 사랑하시여 상주의 후계 김선생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뒤에 남명선생이 덕산에 들어오시매 드디어 문인이 되어 소학, 근사록 성리제서를 받아 독실히 공부하시니 조 선생이 칭찬하여 나의 벗이라 하며 내가 인재를 얻어 가르친다 하였다. 이때에 오 덕계  최 수우당 김 동강 정 한강 같은 제현이 모두 문하에 있었으며, 선생이 날마다 더불어 정성껏 공부하니 학문이 크게 발전하였다.
 선생은 뛰어난 천품이 일찍부터 알려져서 덕행이 성열하니 그 청명하신 기상을 남명은 눈 속의 매화 같다 하셨고, 그 정대한 기량을 덕계는 매사에 침착하고 너그럽다 하셨고 그 확실한 절조를 한강은 각재와 수우당은 비록 기상은 부동하나  대절에 다달아 빼앗을 수 없음은 각재도 또한 같으며 학문에 이르러서는 더욱 힘썼다 하셨고, 또 이르기를 도산의 조월천과 덕천의 내복당은 공문의 안연이라 하였은즉, 이에 선생의 강명한 고덕을 가히 알겠다. 정묘년에 사마시에 장원하시고 다시는 과거에 응하지 아니하고 임천에 숨어서 경적만으로 스스로 즐기시니, 조정에서 그어짐을 듣고 두 번이나 침랑으로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아니하니 세사에 뜻이 없는 것 같았으나, 그 임금을  생각하며 나라를 걱정하고 시사에 마음을 상하고 시속을 근심하는 뜻이 왕왕히 음영 중에 나타나며 또한 일찍이 만언의 상소문으로 선도책을 폈었는데 애석하다. 그 글을 지금은 얻지 못한다.
  선생이 대각촌 각봉 앞에 띠 짚을 얽어 자호를 각재라 하고, 또 일신재를 일으켜 후진을 가르치니 와서 배우는 자가 심히 많아 감당하지 못하였으니, 당시의 급문 제현에 나의 선조 송정선생과 사호 오공이 이름난 선비로 그 문장이 드러났다. 만년에 수곡의 옛집에 돌아오시어 그 당을 편하여 내복이라 하니 학자들이 또한 내복 선생이라고 하였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십 육년에 여러 문인들이 우러러 사모함을 그치지 아니하고 사당을 세워 제사코자 일향에 의논하니 일향이 모두 잘한다 하고 이웃 고을 역시 옳다 하기에 드디어 대각서원을 세우니 그 땅은 선생 정사 일신재의 옛터이다. 고종 초년에 나라의 금지로 서원을 철폐한 뒤 원지에 동쪽 바라보이는 곳에 유허비를 세워 경앙의 정성을 다하고, 광복 후 무자 년에 원지에서 서쪽으로 일령을 넘어 대각서원을 다시 세워 차례로써 제사 하니라. 지난 신유년에 제족이 합모하여 탄성갈력으로 사칸 집을 선생께서 사시던 옛터에 짓고 그 옛 편액을 걸었음은 선대의 자취를 소중히 함이다.
 그 규모의 화려하고 화려하지 못함을 말할 것이 아니라 또한 효심의 면면함이 아니면 어찌 이 일이 이루어졌겠는가! 화려하여 마지않는다. 주손 영청泳淸이 그릇 알고 두근斗根에게 기문을 촉탁 하거늘, 생각건대 소말한 후손이 글도 모르면서 그 어찌 선생 덕행의 만분의 일인들 헤아려 본 뜨리요? 굳이 사양하였으나 부득하여 망설이다가 그 참람하고 외람됨을 잊어버리고 정성 드려 선현들 서술한 문자 중에서 주워 모아 성편하여 어진 후손들의 요청에 보답하노라.
重建記
我從先祖覺齋河先生生嘉靖戊戌卽李朝中宗三十三年也儀表軒昻才智聰穎及受學不煩勤督日誦數券文先子風月軒公甚奇愛之請敎於尙州後溪金先生后南冥先生入德山也遂執贄師事之受小學近思錄性理諸書悎悎篤工曺先生稱以吾友曰吾得人而敎誨也是時吳德溪崔守愚金東岡鄭寒岡諸賢皆在門下先生日與之切偲琢磨學以大進先生天品節異於人聞道旣早德成行熱其氣象淸明則南冥曰如雪中寒梅其器量之正大則德溪曰處事從容其節操之確然有守則寒岡曰覺齋與守愚氣象雖不同然臨大節不可奪則覺齋亦然至於學問尤有功焉又曰陶山之月川德川之來復乃孔門之顔淵卽此盖先生之剛明高德可知矣丁卯中司馬第一而不復應擧晦跡林泉以經籍自娛朝廷聞其賢再以徵寢郞皆不就邈然若無意於世者然其念君憂國傷時憫俗之意往住發於吟詠又嘗草疏數萬言以陣匡濟之策而惜乎其文今不得也先生結茅於大覺村覺峰下自號曰覺齋又起日新齋敎迪後進來學者甚多有舍不能容而當時及門諸賢吾先子松亭先生及思湖吳公以名儒聞其爲文章也晩年還水谷舊居扁其堂曰來復學者又稱來復先生先生旣歿之十有六年及門諸子景慕不己議欲立祠俎豆而謀及一鄕一鄕皆善之謀及隣邑隣邑亦義之遂建大覺院其地則乃先生精舍日新齋舊址也高宗初載以邦禁撤院後樹遺墟碑于院址之東一望地以寓景仰之忱光復後戊子院址之西越一嶺復建大覺書堂以菜儀祀之往在辛酉諸族殫誠竭力築四架五楹屋于先生結茅處揭其舊扁者重先跡也其規模之華不華無足論之而亦非孝思之綿綿則烏能成此事耶爲賀不己冑孫泳淸謬屬斗根爲記顧此眇末後孫而不文其何能模擬先生德行之萬一固辭不獲遂忘其僭猥謹就先賢敍述文字中掇拾成篇以報賢孫之請云爾
                    歲先生旣歿之四百年民國己巳五月上浣從後孫斗根盥手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