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서원 중수기重修記
대각서원 중수기重修記
 
서원書院을 지은 때는 만력 경술년萬歷 庚戌年.1610으로 우리 각재선생覺齋先生을 향사享祀하기 위해서이다. 백년이 지난 정사년丁巳年에 여섯 선생을 뒤이어 봉안하니 방이 협소하고 위패位牌가 비좁아 그 규모를 조금 넓혔다. 그 후 백여년百餘年이 지난 지금 들보는 좀먹어 기울어지고 기둥은 썩어 부러졌다. 이에 부노父老 들이 개탄하며 가군家君에게 촉탁하여 대책을 세우게 하니 드디어 약간의 재물을 내어 해마다 이자利子를 모았다. 하루는 가군家君이 한숨 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만일 경비가 충분히 마련되기를 기다리다간 존엄尊嚴한 자리를 수호하는 도리에 결함이 생길 뿐만 아니라 수명壽命이란 기약이 없어 심력心力을 같이 하던 군자들도 왕왕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러므로 충분함을 기다리다 혹 후회를 남기기보다는 지금 이를 도모하여 몸소 수고로움을 감내하고 성대한 의용儀容을 직접보아 부노父老들의 추모하는 정성에 답하는 것이 났다고 하였다.
이에 병술년丙戌 중추中秋 위패位牌를 강당講堂의 동재東齋로 옮기고 계추季秋에 비로소 착수하여 중동仲冬 22일 초석礎石을 세우고 4일 후 계묘일癸卯日에 상량上樑하였다. 다음해 계춘季春 공사를 마치니 위로는 묘당廟堂으로부터 아래로 신문 주주酒廚 새문塞門 전청典廳에 이르기까지 동시에 새로워졌다. 대개 들보와 기둥과 서까래는 옛 것을 버림이 십十에 팔구八九로 그 공사를 돌아보건대 새로 짓는 것 못지않았다. 이에 참으로 이른바 꿩이 날을 뜻한 처마와 새가 솟을 뜻한 마룻대, 竹田 같은 터전에 송림松林 같은 풍채, 시원한 정원에 정연한 담장이였다. 정녕 임사任使가 적합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찌 이리 완공이 신속하고 그 아름다움을 모두 갖출 수 있었겠는가!
유장柳丈 점坫과 아누 응현膺賢이 그 업무를 담당하고 성모成某 이모李某 조모曺某가 그 역사役事를 맡았으며 하모河某가 그 비용을 조달하였으니 드디어 맹하孟夏 중정일孟夏仲丁日에 봉안체奉安禮를 행하고 잔치를 열어 낙성落成하였다.
아! 우리 각재선생은 조예造詣가 순정純正하여 이미 상등지위上等地位에 올랐다. 남명자는 설중환매雪中寒梅라 칭찬하였고 수우옹守愚翁은 사상백로沙上白鷺라 찬탄하였으니 지금 미루어 상상컨대 그 기상이 눈앞에 보이는 듯하다. 무송선생撫松先生은 인사人事를 배워 천명天命을 달통達通함과, 백암선생白巖先生의 문장과 행실, 영무성선생寧無成先生의 고매 순수함과, 모촌선생茅村先生의 의기 떨쳐 난亂을 바로잡음과, 조계선생朝溪先生의 왕도王道를 귀히 여기고 패도覇道를 천하게 여김과, 송정선생松亭先生의 정심精深한 학문에 이르러는 마땅히 백세토록 향사하며 후학의 존모尊慕가 오래될수록 더욱 깊어 스스로 그만두지 못함을 오늘의 역사役事로 보건대 더욱 징험 할 수 있다.
오늘 이후로 무릇 우리 동지들은 그 시詩를 읊고 글을 읽으면서 사숙私淑하여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도리로 삼고 또 원우院宇를 수리하는 일은 반드시 금일 수군자數君子로써 기약한다면 어찌 선인先人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아름다움이 아니겠는가! 시문記文을 지을 소임은 나같이 글 못하는 이가 감당할 일이 아니지만 돌아보건대 이 역사役事의 전말顚末을 상세히 아는 이는 나만 같은 이가 없기에 갖추어 기록한다.
重修記
院之設在萬歷庚戌爲俎豆我覺齋先生也越百年丁巳追躋六先生而室狹位窄稍廣其制距今百有餘載樑蠹而頹棟朽而橈於是鄕父老慨然屬我家君經劃之遂辨出若干物遂歲取嬴一日家君喟然歎曰如或俟其贍不惟尊嚴之地有欠衛護之道疑要壽無期同心同力之君子往往零落則與其待贍而或致有悔曷若及令圖之躬執其勞目覩盛儀而以答鄕父老慕賢之誠意哉玆於丙戌仲秋移奉位版於講堂之東齋以季秋經始之仲冬之二十有二日竪礎越四日癸卯抛樑翌年季春工役告訖上自廟宇下至神門酒廚塞門典廳同時俱新盖樑棟榱桷之去其舊者十居八九顧其爲工不下新創信所謂翬飛鳥革竹苞松茂而噲噲之庭井井之垣者矣苟任司之非其人則鳥可成之速而盡其美哉柳丈坫卯君膺賢實摠其務成某李某曺某董其役河某調其用遂以孟夏之仲丁行奉安禮而設讌以落之鳴呼若我覺齋造詣純正己到了上面地頭而南冥子雪中寒梅之稱守愚翁沙上白鷺之贊至今追想如見其氣像至於撫松先生之下學上達白巖先生之文章行誼寧無成先生之淸高純粹茅村先生之奮義料亂潮溪先生之貴王賤覇松亭先生之學問精深俱宜廟食百世而後學之尊慕愈久愈深不能自己者觀於今日之役益可驗矣自今以往凡我同志者誦其詩讀其書以爲私淑自新之道而其於院宇修葺之事亦必以今日數君子自期焉則亦豈非繼志述事之至懿乎至若記事之責非不文所可承當而顧詳其顚末於此事者或莫如景賢故爲備錄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