喚醒齋公 河洛 墓碣銘
喚醒齋公 河洛 墓碣銘
 영남嶺南에는 예로부터 아주 뛰어난 선비가 많았는데, 공公의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북쪽으로 와서 유학할 때 그 누구도 공을 앞서는 사람이 없었으니 참으로 뛰어난 선비였다. 
  공은 성이 하씨河氏이고 휘는 락洛이요 자는 도원道源이며 스스로 호를 환성재喚醒齋라 하였다. 무진년戊辰年1568년 진사시進士試에 장원을 하였고 생원시生員試에는 제2등으로 합격하였다. 아우 각재覺齋 휘 항沆과 남명南冥선생 문하에서 수업을 하였고, 형제가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독실하게 공부하여 이치를 밝혀 함께 문장과 행실로 칭송을 받았다. 공은 천거로 왕자사부王子師傳가 되었고 우계牛溪 ․ 율곡栗谷 두 분 선생과 교유하며 학문과 덕을 닦았다. 계미癸未, 1583년 즈음에 여론이 어긋나고 빗나가서, 우계 ․ 율곡 두 분 선생이 모함을 심하게 당하자 공이 소를 올려 철저하게 시비를 가리니 명성이 더욱 맑게 드러나서 널리 퍼졌다. 그러나 이때부터 벼슬살이를 즐거워하지 않고 물러나서 상주尙州로 돌아왔다. 임진왜란에 적을 피하여 산 속으로 들어갔는데 상주목사가 공과 함께 적을 막을 계책을 논의하고자 하였다. 공이 성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왜적들이 몰려들어 공이 마침내 이곳에서 죽었다. 공의 한 분 아드님인 경휘鏡鏡는 기축己丑 1589년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예로써 어버이를 섬겼는데 이때 공을 모시고 이곳으로 들어왔다. 적이 먼저 공에게 덤비므로 적의 칼날을 막으며 애처롭게 하소연하다가 함께 해를 당하였다.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내리니, 이에 부자가 또 충忠과 효孝로써 명성을 날렸다. 
 공의 시조는 고려조의 하공진河拱辰이라는 분이다.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서 거란契丹에 사신을 가서 3년 동안 억류되었다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순사殉死하여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로 포증褒贈되었다. 그 아드님 칙충則忠은 음직蔭職으로 벼슬하였고, 이분의 아드님은 탁회卓回인데 문과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이분의 아드님은 정재挺才인데 한림학사翰林學士이다. 그 뒤에 내리 3대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 3대의 아래가 식湜인데 진강군晉康君이며, 시원恃源은 진강부원군晉康府院君, 윤구允丘는 문과에 급제하여 부윤府尹을 지냈고 유游는 문과 급제하여 판윤判尹을 지냈다. 판윤은 휘 지명之溟을 낳았는데 군수郡守이고, 휘 현現은 직장直長이며, 휘 응천應千은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였고, 휘 형瀅은 현감이니, 이 분들이 공에게서 4대이다. 조정에서 관리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고 좌승지左承旨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그 손자 선璿은 이 일로 승진하여 감찰監察이 되었다. 공을 타관인 상주에 임시로 장사葬事했었는데, 을유乙酉 1645년에 공과 생원의 묘를 진주로 옮겨 모시고 장차 모某 연 월 일에 수곡水谷에 있는 임좌壬坐의 자리에 영구히 장사를 하려고 하였다. 감찰은 계축년癸丑 161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으니, 나와 동방同榜이다. 감찰이 일흔의 나이에도 동방의 의리로써 천리를 멀다고 여기지 않고 나를 찾아와 매우 간절하게 명문銘文을 청하였다. 감찰은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장사를 치르는 일 때문이었다. 감찰의 정성이 지극하고 그 의리가 비장하다고 하겠다. 나는 글을 잘하지 못하니 어찌 그의 바람을 채워줄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또한 그의 뜻을 차마 저버릴 수 있겠는가? 마침내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었다.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경전을 궁리하여 모든 행동의 근원을 독실하게 닦았고 세상에 나와서는 의로운 일을 실천하여 대현大賢이 당한 억울함을 바로 잡았다. 부자父子가 함께 순사殉死하였으니 충忠과 효孝는 더욱 밝게 드러났다. 천추만세가 지나더라도 이 작은 빗돌은 그 아름다운 이름을 길이 전해 주리라.
                                          영상領相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찬
墓碣銘
嶺南古多傑特之士 公卽晉陽人也 北學而莫之或先 眞傑特者也 公姓河 諱洛 字道源 自號喚醒齋 魁戊辰進士 生員中第二名 與弟覺齋諱沆 同業于南冥先生之門 兄弟孝友 篤學明理 俱以文行稱 公用薦剡爲王子師傳 與牛栗兩先生 有麗澤之益 癸未年間 時議乖刺 牛栗兩先生 被詆誣甚 公抗䟽洞辨 名聲益彰澈大播 然自是不樂仕 退歸尙州 壬辰之亂 避入山中 地主爲議事要公 公入州而賊奄至 公遂死之 一男鏡輝 己丑生貟 事親以禮 至是從公入 賊先犯公 乃傃刀哀號 幷遇害 朝廷㫌其閭 於是父子 又以忠孝名  公之先 在麗朝有曰拱辰 以門下侍郞 使契丹留之三年 不屈死 褒贈同平章事 其子曰則忠蔭仕 是生卓回文科 是生挺才翰林 後三世 皆文科 三世之後曰湜晉康君 曰恃源晉康府院君 曰允丘文科府尹 曰游文科判尹 判尹生諱之溟郡守 諱現直長 諱應千生員壯元 諱瀅縣監 寔公之四代也 自朝家遣官諭祭 贈左承旨官 其孫璿由是進爲監察 公寄葬尙州 乙酉公與生員之墓遷厝于晉州 將以某年月日 永窆于水谷壬坐之原 監察乃癸丑進士 與余同榜也 年七十餘 以同年之義 不遠千里而訪余 乞銘甚懇 監察拜主簿而解官歸 爲葬事也 其誠至矣 其義悲矣 余不文 奚足以塞其望 而亦何忍孤其志也 遂爲之銘曰 處而竆經 敦百行源 出而行義 直大賢寃 父子同死 忠孝益彰 千秋片石 永流其芳
                                           領相 白軒 李景奭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