進士公 河恪 墓碣銘
거창군 고제면 개명리 산93의 1번지의 신좌원辛坐原 오척봉五尺封은 고故 선조 조故宣祖朝 진사 하공進士 河公 휘諱 각恪, 자字 자익子益과 배위配位 동래東萊 정씨鄭氏의 합분 묘소合墳 墓所이다.
금춘今春에 공公의 12세손十二世孫인 병건炳乾 병조炳朝 형제兄弟가 서실書室로 나를 찾아와 이르기를 심산중深山中에 위치한 사백四百년 선산先山을 수호守護하기가 극난極難하므로 부득이 북상면 가곡 촌 후산 간좌원艮坐原에서 자손들의 거주지였던 이 땅으로 천장遷葬하여 수치修治하려 하니 집사執事는 묘명墓銘을 찬撰하라 하므로 문득 원필援筆 쓰기를, 공公은 진양인晉陽人으로, 고려 충절신 증문하시랑동평장사忠節臣贈門下侍郞同平章事 휘諱 공진拱辰이 시조始祖이시고, 누전累傳하여 휘諱 거원巨源은 공민왕조恭民王朝의 증 병조판서 행중정대부 전객령贈兵曹判書行中正大夫典客令으로 공公의 십대조十代祖이시며, 삼전三傳하여 휘諱 순경淳敬은 좌익 원종공신 행성균직강佐翼原從功臣行成均直講이니 공公의 육대조六代祖이시다. 증조曾祖의 휘諱 우치禹治는 안주목사安州牧使요, 조祖의 휘諱는 숙淑이시며 승사랑承仕郞이시고, 고考의 휘諱는 위보魏寶니 진평군 증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晉平君贈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이고, 외조부外祖父는 참의參議로 사천 이씨泗川 李氏 휘諱 륜綸이셨고, 또 한분의 외조부外祖父는 진양강씨 참의參議 휘諱 우佑이셨다. 공公은 명종(明宗) 10년 을묘乙卯 1555년 진주 단목에서 11남 중 삼자三子로 태어나니 유년幼年부터 영오穎悟하여 효제孝悌에 진성盡誠하고 성품性品 또한 온후溫厚하여 자성資性이 발중拔衆하며, 지항志向이 겸개慊慨하여 시세를 우념憂念하니 부조父祖의 기망期望 또한 비범非凡하였다. 선조12년 기묘己卯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여 방명芳名이 진주 연계안蓮桂案에 소연昭然했건만 불의不意의 세란世亂으로 과거를 유보하고 초야에 장수藏修하여 후진을 양성養成하며 오로지 식덕植德에 여념餘念이 없더니, 마침 임란壬亂이 발發하자 안의북상安義北上으로 피난하여 주야로 고향을 그리워하다가 그만 일질一疾을 얻어 요졸夭卒하니 선조宣祖 29년 병신丙申 1596년이다.
이에 사린四隣이 함께 제읍制泣하니 어찌 애석하지 않으리오. 의방교육義方敎育에 진성盡誠하였으니 그 이모貽謨하고 적덕積德한 학문의 명성名聲을 백세百世토록 불절不節할 것이다. 남男 시운始運은 자字 형보兄甫니, 축대築坮하여 고향 선영先塋에 망배望拜하며 친족親族을 이산離散하고 어쩔 수 없는 비극悲劇의 현실現實이라 역사歷史 속에 묻어두고 속으며 살아온 한限많은 세월이 아니던가? 손孫은 문백文伯이며 증손曾孫에 태윤泰潤이며 현손玄孫은 응천應千이다. 여餘는 불록不錄하고 명銘을 읊어 이르기를,
고향故鄕 떠나 피란길 어언 사백십四百十, 갈망渴望하던 고향산천 그 심사心思 뉘 알리요? 출세出世마저 멈추고 산중山中에서 생을 마치니 나라일 근심하여 몇 번이나 체읍涕泣했소.
광복 재병술 계춘절光復再丙戌季春節 2006 삭녕 최인찬 찬朔寧崔寅巑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