剛莊公 河漢 墓碣銘
剛莊公 河漢 墓碣銘
 공의 성은 하 씨이고 휘는 한漢인데 가계家系가 진양에서 나왔다. 조부祖父는 서운관부정 증贈 병조판서 휘諱 승해承海이고 부친은 의정부 좌찬성 양정공 휘諱 경복敬復이며,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정鄭씨이다. 공이 당초에 세종 장헌대왕(莊憲大王)을 섬겼다. 왕이 즉위한지 16년 1434년에 회령진과 영북진 절제사로 되었다가 얼마 후에 함길도 경력으로 제배除拜되었다. 그때 찬성공(양정공)이 함길도 도절제사로서 도체찰사를 겸하고 있었는데 공公이 군무軍務를 보좌하면서 모두 기의機宜에 맞게 하니 야인 여진이 머리를 조아리며 순종하여 변경을 시끄럽게 하는 일을 감히 못한 것이 10년이었다. 당시 논의論議하는 사람들이 “조정에서 북방 일로써 다시 근심하지 않고 성교聲敎가 삭막朔漠에 미치게 된 것은 공公의 부자父子 힘이다.” 라고 하였다. 1438년세종20년 찬성공양정공의 상喪을 당하였고, 1449년세종31년 황해도도절제사겸황주목사로 제수되었다. 또 문종 공순대왕恭順大王을 섬겨서 동지중추원사와 경상좌․우도처치사가 되었고, 단종 공의대왕恭懿大王을 섬겨서 경상좌․우도 도절제사로 되었다. 그리고 세조 혜장대왕惠莊大王을 섬겨서 자헌대부 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다. 임금이 조회에 나와서 여려 신하를 돌아보며, “내가 양녕대군을 보면 사냥을 생각하고, 김구金鉤‧김말金末을 보면 서적書籍을 생각하고, 하한河漢을 보면 정벌을 생각한다.” 하였는데, 대개 임금의 뜻은 공公에게 부친父親의 풍도風度가 있어 크게 쓸 만한 인물임을 깊이 알고 구태여 염파廉頗와 이목李牧같은 사람을 구해서 장수 삼기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 주의注意해서 돌봄이 6년을 이와 같이 했는데 1460년(세조6년) 12월 26일 병을 얻어서 별세하였다. 임금이 슬퍼하며 조문弔問과 부물賻物을 예例대로 행하게 하고 강장剛莊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니, 굳세고 과감함을 강剛이라 이르고, 적을 이기는 큰 뜻을 장莊이라 이른다. 공公의 배위配位 안씨安氏는 순원군 처處의 따님이고, 후배後配는 박씨朴氏이며 함양이 본관인 지한之漢의 따님인데, 모두 정부인貞夫人으로 봉호封號되었다. 아들이 넷인데, 맹보孟溥는 제용감녹사이고 중보仲溥는 종사랑이다. 숙보叔溥는 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시호諡號가 경절敬節이고, 계보季溥는 문과에 올라 사헌부 장령掌令이다. 묘소는 하동 섬진강 옆 화심동 감좌坎坐 둔덕에 있고 박씨 부인과 무덤을 함께 했다. 공公의 후손들이 공公의 무덤이 대부大夫의 의제儀制에 모자라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이번에 힘을 모아서 높은 비를 세우기로 의논한 다음 겸진謙鎭에게 그 사실을 서술하고 격려하도록 부탁하였다.
 시詩를 지어 말하리라. 높고도 크시도다, 양정공이시여! 임금과 나라 위해 수고로움 다하셨네. 북녘에서 법이 되어 요해처要害處를 지키셨네. 북쪽 오랑캐들 날뛰니 그 괴로움을 생각하였도다. 변방의 연기를 깨끗이 종식시키고 돌아옴에 벼슬이 그치지 않았도다. 공公과 같은 아들 있어 무략武略과 도량度量이 같도다. 네 임금 거쳐 섬기어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에도 한결같았다. 임금이 그 공적 가상(嘉尙)히 여겨 발탁하여 기밀사에 두셨네. 선왕(先王)이 명철한 성인(聖人)이라 이와 같이 옛 신하 생각했네. 능히 이런 계책 단단히 하여 아들 한 사람 도우셨네. 정복하고 토벌할 생각에 고생 모르고 분발했네. 추중하여 임종에 의전(儀典)을 행하고 시호와 태상(太常)을 논의했네. 굳세고 강한 의지를 단단히 드러냄은 많은 사람을 필적(匹敵)하고 이에 당상(堂上)의 부월(斧鉞)을 바라보니 꽃술의 받침이로다. 그 아래 섬강은 기운이 방장산에 이어 있다. 방장산은 높고 높으며 섬강은 넓고 넓다. 현명한 혼령은 어제같이 뚜렷하니 멀고 먼 미래에도 잊히지 않으리.
                                               후예後裔 겸진謙鎭 근찬謹撰
墓碣銘
姓河氏諱漢系出晉陽祖書雲副正贈兵曹判書諱承海父議政府左贊成襄靖公諱敬復 妣貞夫人鄭氏公始事世宗莊憲王王卽位之十六年甲寅爲會寧寧北節制使尋拜咸吉道經歷時贊成公以咸吉道都節使爲都體察使而公佐戌務悉中機宜女眞野人稽首效順不敢生事擾邊且十年論者謂朝廷不復以北顧爲憂而聲敎訖于朔漠本公父子之力也知中樞院事慶尙左右道處置使事恭慤王爲慶尙道左右都節制使事惠莊王陞資憲大夫知中樞府事上臨朝顧謂諸臣曰吾見讓寧則思田獵見金鉤金末則思書籍見河漢則思征討蓋王意深知公有父風可大用無事乎思得廉頗李牧爲將也其見眷注如此六年庚辰十二月二十六日得疾卒上震悼弔賻如例賜諡剛莊强毅果敢曰剛勝敵志壯曰莊公配安氏順原君處女後配朴氏咸陽之漢女皆封貞夫人四子孟溥濟用錄掌令墓在河東蟾津江上花心洞負坎原朴夫人同窆群裔以公墓而闕大夫之儀胥以爲戚乃今募力謀樹崇碑屬謙鎭敍其事而擊之詩曰屹屹襄靖盡瘁王國如北有準爲厥鎖鑰朔醜駾矣惟其喙矣邊煙淨息歸市不止有肖惟公若武于弘歷事四朝夷險如一王嘉乃績擢置機密先王明聖爾惟舊臣克壯爾猷毗子一人征討之思無勞拊髀崇終有典議諡太常發强剛毅百夫之防粤瞻堂斧花心之跗其下蟾江氣接方壺方壺嵂嵂蟾蟾江沄沄明靈如昨終古不諼
                                                          傍裔謙鎭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