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부원군 하윤린 신도비명 晉陽府院君 河允潾神道碑銘
유명有明 조선국朝鮮國 증충훈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贈忠勳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 하공河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서문도 아울러서-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승부윤敬承府尹 수문전修文殿 제학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 변계량卞季良 지음.
영락永樂 13년 을미乙未 : 1415 겨울 12월에,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 호정선생浩亭先生이 계량季良 : 변계량에게 부탁하시기를, “돌아가신 우리 아버님께서는 덕德을 심어 후손들을 위해서 넉넉히 은택恩澤을 끼쳤기에 나 이 보잘것없는 자식이 두 번이나 공신功臣들의 회맹會盟에 참여하고, 외람되게 높은 관직에 올랐고, 또 임금님이 내리는 은혜로운 특전特典을 입어, 위로 3대에 걸쳐 봉호封號를 받거나 증직贈職을 받았소. 이에 묘소 가는 길에 비석을 세워 다가오는 후세들에게 보여야 하니, 마땅히 문장이 있어야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오. 그대는 글을 지어주기 바라오.”라고 했다. 계량季良이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삼가 살펴보니, 공公의 성은 하씨河氏요, 휘諱는 윤린允潾, 자字는 소개所開, 진양晋陽의 명망 있는 집안이다.
윗대 조상 가운데 고려高麗 때 벼슬해서 좌사낭중左司郞中을 지낸 휘 공진拱辰은 현종顯宗 때 공훈이 있어 문하시랑동중서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사문박사四門博士 휘諱 탁회卓回는 고종高宗 : 1213 - 1259 때 벼슬했는데, 부모님이 연로하였기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박사博士 : 卓回가 정재挺才를 낳았고, 정재가 남수南秀를 낳았고, 남수가 소邵를 낳았고, 소邵가 휘諱 부심富深을 낳았는데, 공公에게 증조부가 된다. 박사로부터 아래로 4대에 걸쳐 계속해서 과거에 올랐다. 증조부와 그 형님 호浩 및 부扶도 모두 과거에 올랐다. 나라의 제도에 따라 그 어머니에게 녹祿을 지급했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
조부 휘諱 식湜은 증순충보조공신贈純忠補祚功臣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 진강군晋康君이다. 부친 휘諱 시원恃源은 증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우정승右政丞 판병조사判兵曹事 진강부원군晋康府院君이다. 승봉랑承奉郞 풍저창부사豊儲倉副使 정균鄭均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원元나라 지치至治 신유辛酉 : 1321년 4월 정사일丁巳日에 공을 낳았다.
자질이 보통 아이들과 달랐다. 7세 때 모친상을 당했는데, 곡하며 슬픔을 다하는 것이 어른과 같았다. 경오庚午 : 1330, 10세년에 처음으로 스승에게 공부하러 나갔다. 계유癸酉 : 1333년에 고을의 어른 증숭록대부贈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찬성사贊成事 판호조사判戶曹事 강승유姜承裕공이 보고서 기특하게 여겨 그 딸을 시집보냈다. 강공姜公은 성격이 엄하였는데, 공은 아버지처럼 섬겼다.
지정至正 병술丙戌 : 1346, 26세년에 처음으로 충목왕忠穆王 : 1344 - 1348의 조정에 벼슬하여 식목도감式目都監 녹사錄事가 되었다.
정해丁亥 : 1347, 27세년 봄에는 강씨가 길한 꿈을 얻어 임신을 했다가 12월에 아들을 낳았으니, 곧 의정공議政公 : 河崙이다.
임진壬辰 : 1352, 32세년에 선관서승膳官署丞에 제수되었다. 을미乙未 : 1355, 35세년에는 선관서령膳官署令으로 승진하였다. 병신丙申 : 1356, 36세년에는 문하부門下部 녹사錄事로 옮겼다. 고려 말엽에는 문하부의 크고 작은 물자 공급을 녹사에게 맡겼으므로, 녹사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모두 그만두려고 했다. 공은 마음을 다해서 마련하기를 도모하니, 문하부의 관원들이 칭찬하였다. 무술戊戌 : 1358, 38세년에는 선덕랑宣德郞 북부령北部令에 임명되었다. 경자庚子 : 1360, 40세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상복喪服을 입고 상주 노릇하여 상기喪期를 마쳤다.
계묘癸卯 : 1363, 43세년에 지숙주군사知肅州郡事가 되었는데, 품계는 조봉랑朝奉郞이었다. 실로 공민왕恭愍王 13년이었으니, 가짜 왕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가 몽고족蒙古族 군대와 한족漢族 군대를 거느리고 장차 고려를 침략하려고 했는데, 여러 도道의 군대가 서북지방에 모였다. 가짜 왕이 패배하여 달아났는데, 장수들이 왕래하는 길이 모두 숙주肅州를 경유하였다. 공은 이들을 대접하는 데 있어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그 해는 흉년이 들었으므로, 돌아온 군사들은 굶주려서 얼굴이 누렇게 뜬 사람이 많았다. 공은 자신의 녹祿을 덜어내고, 또 고을 사람 가운데서 곡식을 쌓아두고 있는 사람에게 권하여 도와 구제하게 하여 살린 사람이 많았다.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 어짊과 용서를 근본으로 삼아,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는 일을 없애고 형벌을 줄이니, 아전이나 백성들이 은덕恩德을 입었다고 여겼다. 다른 사람과 교대하게 되자, 눈물을 흘려 울면서 전송하는 사람이 있기까지 했다.
을사乙巳 : 1365, 45세년 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해 가을에 의정공議政公 : 河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 다음해 사관史官으로 선발되었다. 공이 말하기를, “아들이 있어 조정에서 벼슬하니, 나는 다시 벼슬할 필요가 없도다.”라고 하고는, 고을의 노인들과 금강사金剛社라는 모임을 만들어 느긋하게 지내며 세월을 보냈다.
그 당시 왜구倭寇가 한창 날뛰었다. 공이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고을은 바닷가에 있어 섬 오랑캐들이 해마다 침략해 오고 있소. 서남쪽에 사는 사람들이 먼저 그 해를 입는데, 형세를 보니 반드시 읍내까지 오겠소. 의당 북쪽 마을로 가서 그 칼날을 피하는 것이 옳겠소”라고 하고는, 정사丁巳 : 1377, 57세년에 집안을 이끌고 동곡桐谷으로 가서 집을 지었다. 그 다음해 가을에 과연 왜구가 읍내까지 왔으므로 노략질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다. 공은 동곡으로부터 강성현江城縣의 산성山城으로 들어가 온 집안이 홀로 온전할 수 있었다. 고을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했다.
의정공議政公이 그 때 대사성大司成으로 있으면서 재상宰相에게 글을 올리기를,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신 곳에 섬 오랑캐가 자주 이르니, 저는 잠시도 편안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 순흥부사順興府使는 유학자儒學者입니다. 바라건대, 저 대신 그 사람을 대사성에 임명하시고, 저 부친을 순흥부사로 임명해 주십시오.”라고 하니, 재상이 그 말을 의롭게 여겼다. 경신庚申 : 1380, 60세년 가을에 공을 부사로 임명했는데, 품계는 봉익대부奉翊大夫였다. 이 이전에 공은 원외랑員外郞 관직에 임명되어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그래서 옛날 품계品階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부임하여 은혜로운 정치가 있어 백성들이 바야흐로 흠모하면서 좋아하였으나, 병이 나 9월 24일에 부인 강씨姜氏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나이가 육십이고, 아들도 뜻대로 다 잘 되었으니, 무슨 남은 한이 있겠소? 하물며 사람의 수명이 길거나 짧거나 하는 것은 천명天命 아닌 것이 없으니, 모두가 다 끝나는 데로 돌아가지요. 단지 먼저 가느냐 나중에 가느냐만 있을 따름이니, 상심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말을 마치자 곧 숨을 거두었다.
의정공은 부친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약을 준비하여 이틀을 급히 달려 이르렀으나, 운명殞命하는 것을 보지는 못하였다.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영구靈柩를 받들어 진양晋陽으로 돌아가 밤낮으로 그 옆을 떠나지 않았다.
그 해 12월 갑인일甲寅日에 동방동桐房洞 감산坎山의 산에 안장安葬하였다. 공公의 어머니 묘와는 9보步 떨어져 있고, 또 그 북쪽 아버지의 묘와는 10보 떨어졌다. 관棺은 통나무를 그대로 쓰고, 곽槨은 7촌 두께로 했다. 상례喪禮와 제례祭禮에 필요한 모든 도구는 문공文公 : 朱子이 쓴주자가례朱子家禮에 전적으로 의거하였다.
우리 조선왕조朝鮮王朝 무인戊寅 : 1398년에 의정공議政公이 정사공신定社功臣이 됨으로 해서 공에게 충훈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忠勳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 특진보국숭록대부特進輔國崇祿大夫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판병조사判兵曹事 진양백晋陽伯을 추증追贈하였다. 임오壬午 : 1402년에는 의정공이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을 더해주었다.
공은 타고난 바탕이 두텁고 무거우며 몸가짐이 청렴하고 간결하였다. 평생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았고, 또 농담을 한 적도 없었다. 재산을 늘리는 것에 마음을 둔 적도 없었다.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나왔고, 일가들과 화목하게 지냈고, 고을에서는 온화하게 처신하여 즐거워하는 모습이었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셨는데, 숙부가 노비를 고루 나누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아우나 조카들이 관가에 소송을 하려고 하자, 공은, “어찌 감히 숙부와 다툰단 말인가?”라고 말하며 그들을 말렸다. 숙부가 세상을 떠나니, 아우와 조카들이 전에 소송하려던 말을 강하게 주장하자, 공은 또 “종형제끼리 어찌 서로 소송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아우와 조카의 자손과 재종형제들이 소송하여 요청하니 관가에서 나누어주었다. 의정공議政公은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돌아가신 우리 부친께서 하려고 하지 않던 바이다”라고 했다. 여러 아들들에게 주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여러 아들들이 받는 것이 곧 내가 받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강씨姜氏는 집안을 잘 다스렸고 늘 예법을 따랐다.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고, 순종함으로써 남편을 섬겼다. 자손들을 가르치는 것은 엄하면서도 이해를 잘했고, 일가나 인척들을 대하는 데는 은혜로우면서도 두루 마음이 미쳤다.
을해乙亥 : 1395년에 병으로 눕게 되었다. 그 때 의정공議政公은 중추원사中樞院使로 있었는데, 임금님을 뵈옵고 휴가를 요청하여 역마驛馬를 달려 3일 만에 이르렀다. 약을 맛보고서 바치니 강씨께서 말씀하시기를, “너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아 너의 영광스런 봉양을 보게 되었으니, 약을 마셔서 살기를 구하기를 원치 않는다.”라고 하셨다. 의정공은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권했다. 7월 초4일에 의정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늙었느냐 젊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너와 너의 누이가 모두 아무 탈이 없으니, 내가 이제 먼저 가는 것이 어찌 다행한 일 아니겠느냐? 여러 가지 약을 억지로 들이려고 하지 말라.”라고 했다.
그 이튿날 한평생을 마치니, 76세였다. 9월 병오일丙午日에 공公의 묘소의 남쪽 11보步 되는 곳에 붙여 안장하였다. 무인戊寅 : 1398년에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들은 휘 륜崙인데, 분충장의동덕정사좌명공신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의정左議政 수문전修文殿 대제학大提學 영경연춘추서운관사領經筵春秋書雲觀事 세자사世子師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이다. 봉익대부奉翊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성산星山 이공李公 휘諱 인미仁美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병술丙戌 : 1406년에 부인이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해졌다.
공의 따님은 정순대부正順大夫 연안부사延安府使 유극서柳克恕에게 시집갔다.
의정공議政公의 아들 구久는 중군도총제부中軍都摠制府 도총제都摠制이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이종덕李種德공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의정공의 맏따님은 이조우참의吏曹右參議 홍섭洪涉에게 시집갔고, 그 다음 따님은 좌군도총제부左軍都摠制府 총제摠制 이승간李承幹에게 시집갔다.
의정공의 서자가 셋인데, 장長과 연延은 모두 어리다. 영永은 의흥시위사義興侍衛司 대호군大護軍이다.
부사府使 : 柳克恕의 아들 유정柳汀은 호조정랑戶曹正郞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의정공議政公의 도덕과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이름과 공훈의 융성함은 견줄 데가 없다. 진실로 생각해 보니, 반드시 그 복록福祿을 발하게 된 유래는 오래 되었을 것이다. 아아! 진양공晋陽公 : 允潾이 착한 일을 계속하고 덕德을 이루었으니, 그 보답을 누리는 것은 마땅하지만, 그 자신에게서 받지 못 한 것은, 하늘이 장차 그 보답을 크게 하기 위해서 늦춘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하면 보답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했는데, 나는 진양공에게서 이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 흘러내린 은택恩澤이 오래 가고 남긴 경사가 긴 것이 끝이 있겠는가? 아아! 훌륭하도다. 명銘은 이러하다.
흐름이 펼쳐져 나가려면, 有流斯張,
그 원천源泉이 쌓여 있어야 한다네. 維蓄其源.
가지가 무성하려면, 有枝斯茂,
그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네. 維固其根.
훌륭하도다! 하씨는, 懿哉河氏,
실로 덕德이 있는 가문이로다. 實惟德門.
우뚝한 저 좌사낭중左司郞中 : 河拱辰은, 卓彼左司,
특별한 공훈이 있었다네. 克有殊勳.
이에 그 덕德을 두터이 쌓아, 乃厚其積,
후손들의 길을 열어주셨도다. 以啓後昆.
미덥고 후하신 진양공晋陽公 : 河允潾이시여! 振振晉陽,
오직 덕德을 부지런히 닦았다네. 惟德是勤.
천륜天倫을 중히 여겨 집안의 송사 막았도다. 厚倫息訟,
사람들은 그 의리에 감복했네. 人服其義.
집을 옮겨 왜구를 피했나니, 移家避寇,
사람들이 그 지혜에 탄복했도다. 人服其智.
두 고을을 은혜롭게 다스렸나니, 惠于二州,
백성들은 부모처럼 사모했네. 民慕怙恃.
의롭고 지혜롭고 또 은혜 베풀었으니, 義智且惠,
현달하여 이름나는 것 마땅하건만, 顯融是宜.
다 거두고 물러나 고향 집에서 살아가, 斂而家居,
마침내 경륜을 펼치지는 못했다네. 竟莫以施.
하늘이 후손을 내려주어, 天錫爾類,
영명하고 어진 인물 낳았도다. 乃生英賢.
우리 성스러운 임금님을 도우시어, 相我聖主,
지위가 조정 신하들 가운데서 으뜸이었네. 位極朝聯.
차분하게 조정에서 일을 처리하여, 從容廊廟,
여러 가지 업적이 높았도다. 庶績維隆.
공훈과 은덕恩德은 으뜸이고, 勳德之魁,
유학의 최고 대가였네. 斯文之宗.
임금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네. “정승이여! 王曰政丞,
실로 나와 덕德을 같이하였나니, 實予同德.
사직을 안정시키고 천명을 도운 그대의 큰 공적을, 定社佐命,
내가 훌륭하게 여기고 있다오.” 懋乃丕績.
위로 삼대에 벼슬을 추증하시어, 追爵三世,
그 관직이 모두 다 높았다오. 並峻其秩.
정승공政丞公 : 河崙 공훈으로 품계 받으니, 旣勳而階,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의 관직 높았다네. 領府維崇.
모친에게도 작위를 추증하여, 錫之妣爵,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했다네. 辰國是封.
잠겨있던 덕이 크게 드러남에, 不顯潛德,
세상을 떠났지만 살아 계신 것과 같았네. 雖死猶生.
진산晋山은 높고 높고, 晉山峨峨,
진수晋水 : 南江은 넘실넘실 흘러가는구나. 晉水泠泠.
저 감산坎山 기슭을 바라보니, 瞻彼坎麓,
길한 기운 모였도다. 維吉之叢.
아버님 어머님이, 維考維妣,
다 그 속에 안장됐다오. 俱葬于中.
계속 흘러내려가는 경사는 綿綿流慶,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曷其有終.
우람한 비를 새겨서, 刻銘豐碑,
가없는 오랜 후세에 알린다네. 以告無期.
밝은 후손들이여! 昭玆來裔,
누구인들 공公을 생각하지 않으리오? 孰不公思.
문학박사 경상대학교慶尙大學校 교수 허권수許捲洙 삼가 번역함
임진壬辰 : 2012년 양력 3월 25일.
朝鮮國贈領議政河公神道碑
有明朝鮮國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河公神道碑銘幷序
嘉靖大夫敬承府尹修文殿提學同知春秋館事世子左副賓客 卞季良撰
永樂十三年歲在乙未冬十二月議政府左議政浩亭先生屬季良曰惟我先考種德裕後而 予小子再與勳盟濫登峻秩且承 恩典封贈三世此其碑于墓道以示來世者宜有辭而闕焉子其筆之季良不敢辭謹按公姓河氏諱允潾字所開晉陽望族也先世仕高麗左司郞中諱拱辰有功顯王朝贈門下侍郞同中書平章事四門博士諱卓回仕高王朝以親老免官還鄕博士生挺才挺才生南秀南秀生邵邵生諱冨深於公爲曽祖自博士而下四世相繼登第曾祖公與其兄浩及扶又皆登第以國制廩其母時人歆之祖諱湜 贈純忠補祚功臣輔國崇祿大夫判司平府事晉康君考諱恃源 贈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政丞判兵曹事晉康府院君娶承奉郞豊儲倉副使鄭諱均之女以元至治辛酉四月丁巳生公姿質異凡兒年七歲丁內憂哭泣盡哀若成人然庚午始就學癸酉鄕之長者 贈崇祿大夫議政府贊成事判戶曹事姜公諱承裕見而奇之以其子妻之贊成性嚴公父事之至正丙戌始仕忠穆王朝爲式目都監錄事丁亥春姜氏得吉夢有娠冬十二月生男卽議政公也壬辰授膳官丞乙未陞爲令丙申遷門下錄事 高麗之季門下府大小供億一委錄事爲錄事者率多乞免公盡心營辦府官稱之戊戌拜宣德郞北部令庚子遭外艱終制癸卯知肅州郡事階朝奉郞實恭愍王十三年也僞王塔帖木兒率蒙漢兵將入寇諸道軍會西北僞王敗走其將帥往來皆道于肅公待之無闕其年飢軍士還者多菜色公減俸祿又勸郡人之有蓄者相助賑濟多所全活爲政以仁恕爲本抽歛絶而刑罰省吏民德之及其見代至有涕泣以送者乙巳春還鄕秋議政公登第明年選爲史官公曰有子立朝矣吾不必復仕乃與鄕之父老結爲金剛社優遊卒歲時倭寇方熾公語族人曰吾鄕濱海島寇歲至西南人先受其害勢必及邑里宜就北村以避其鋒至丁巳秋挈家結廬于桐谷明年秋寇果入邑人多被劫掠公自桐谷入江城縣之山城擧家獨全鄕人服公先見議政公時爲大司成上書宰相曰老親所在島夷數至吾未嘗頃刻而自安今順興府使儒者也乞以自代除父順興宰相義其言庚申秋授公府使階奉翊先是公嘗受員外官至奉翊大夫禮儀判書故因其資云旣至有惠政民方慕悅而疾作九月二十四日謂夫人姜氏曰吾年六十子亦成立有何遺恨況人生脩短莫非天命皆歸於盡只有先後耳勿傷心語竟乃絶議政公聞病備藥疾馳二日而至不及屬纊辟踊摧折奉柩歸于晉陽晝夜不離側以其年十二月甲寅葬于桐房洞坎山之岡北距先妣墓九步又其北距先考墓十步棺用全木槨用七寸凡喪葬之具一依文公家禮至 國朝戊寅以議政公定社功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贊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右政丞判兵曹事晉陽伯壬午以佐命功加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公稟資厚重操履廉簡平生不妄語亦無戱言未嘗以營産留意孝友出於天性睦於族親和於鄕黨愉愉如也先考早逝叔父不肯均分蒼赤弟姪欲訴於官公曰安敢與叔父爭止之叔父沒弟姪以前言强之公又曰從兄弟亦豈可相訟及公沒弟姪之子孫與再從兄弟訟諸官分之議政公不受曰吾先子所不爲也請與諸子公曰諸子受是吾受也竟不許姜氏善治家動循禮則奉親以孝事夫以順敎子孫嚴而恕待族姻惠而周乙亥夏寢疾議政公時爲中樞院使謁告馳馹三日而至嘗藥以進姜氏曰汝父逝己久吾至今未亡足見汝榮養不願飮藥求生也公涕泣以勤七月初四日謂議政公曰人之死生不在老少汝及汝娣俱無恙吾今先逝豈不自幸不須强進諸藥明曰卒年七十六以九月丙午附于公墓之南十一步戊寅 贈辰韓國大夫人男諱崙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修文殿大提學領經筵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晉山府院君娶奉翊大夫禮儀判書星山李公諱仁美之女丙戌封辰韓國大夫人女適正順大夫延安府使柳克恕議政男久中軍都摠制府都摠制娶知密直司事李公種德之女長女適吏曺右參議洪涉次女適左軍都總制府摠制李承幹庶男三長延皆幼永義興侍衛司大護軍府使男汀戶曹正郞予惟議政公道德文章之美名位勳業之隆無有比擬固嘗意其必有發之者久矣鳴呼晉陽公之積善成德宜享其報矣而不克有於其躬者豈非天將大其報而遲之也歟古人有言爲善無不報予於晉陽公而徵之矣其流澤之久餘慶之永又可旣耶鳴呼休哉銘曰有流斯長維蓄其源有枝斯茂維固其根懿哉河氏實維德門卓彼左司克有殊勳乃厚厥積以啓後昆振振晉陽維德是勤厚倫息訟人服其義移家避寇人服其智 惠于二州民慕怙恃 義智且惠顯融是宜歛而家居竟莫以施 天錫爾類乃生英賢相我聖主位極朝聯從容廊廟庶績維隆勳德之魁斯文之宗王曰政丞實予同德定社佐命懋乃丕績追爵三世並峻其秩旣勳而階領府維崇錫之妣爵辰國是封不顯潛德雖死猶生晉山峩峩晉水冷冷瞻彼坎麓維吉之叢維考維妣俱葬其中綿綿流慶曷其有終刻銘豊碑以告無期昭玆來裔孰不公思
永樂十四年三月日 奉正大夫直藝文館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僉知承文院事 朴熙中書幷篆
晉陽府院君 河公 諱 允潾 神道碑 陰記
좌의정공左議政公은 서녀庶女가 셋이었는데 첫째는 곡산부사谷山府使 길질金秩에게, 둘째는 중군사직中軍司直 장희걸張希傑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아직 어리다. 도총제都摠制<하구河久>는 사헌부감찰司憲監察 김음金音의 따님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아 둔 아들이 하복생河福生인데 아직 어리다. 총제摠制<이승간李承幹>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 이공전李恭全은 공정고부사供正庫副使이고 둘째는 이신전李愼全인데 사재직장司宰直長이고 그 다음은 각각 이성전李誠全, 이순전李純全, 이항전(李恒全)인데 모두 어리고 한 분의 따님도 아직 어리다. 대호군大護軍<하영河永>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성림李成林의 서녀庶女에게 장가들어 둔 아들이 하계생河繼生인데 아직 어리고 따님도 아직 어리다.
곡산부사谷山府使 <김질金秩>은 두 딸은 두었는데 큰 따님은 의영고부직장義盈庫副直長 도이공都以恭에게 시집을 갔고 한 따님은 아직 어리다. 사직司直<장희걸張希傑>의 아들은 장미張美인데 어리고 두 딸도 아직 어리다. 정랑正郞<류정柳汀>은 중랑장中郞將 김태준金台俊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둔 아들이 류혜생柳惠生인데 미성未成이고 두 따님을 두었는데 큰 딸은 강여위姜汝爲에게 시집을 갔고 작은 딸은 어리다. 용담현령龍潭縣令 정여해鄭汝海의 따님에게 다시 장가들어 세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류효산柳孝山으로 미성이며 나머지는 어리고, 딸 하나도 아직 어리다. 증우정승공贈右政丞公<하시원河恃源>은 둘째 아드님이 종부령宗簿令 하윤구河允丘요, 딸이 둘인데 첫째는 낭장郞將 장온張蘊에게, 둘째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이수李守에게 시집을 갔다.
종부령宗簿令<하윤구河允丘>의 아들은 검교한성윤撿校漢城尹 하유河游이다. 낭장郞將<장온張蘊>의 아들은 검교한성소윤撿校漢城少尹 장익張翼이고 따님은 사복부정司僕副正 김남갑金南甲에게 시집을 갔다.
밀직密直<이수李守>의 따님은 성주목사星州牧使 하유종河有宗에게 시집을 갔다. 한성윤漢城尹<하유河游>은 아들이 넷인데 맏이는 한성소윤漢城少尹 하지혼河之混이고 그 다음은 울산군지사蔚山郡知事 하지돈河之沌, 공조정랑工曺正郞 하지명河之溟, 풍저창주부豊儲倉注簿 하지행河之涬이다. 검교소윤撿校少尹<장익張翼>은 아들이 셋인데 맏이는 학생學生 장경張慶, 다음은 부사정副司正 장필張弼, 그 다음은 미성이며 딸은 사정司正 손번孫磻에게 시집을 갔다. 부정副正<김남갑金南甲>의 아들은 회인감무懷仁監務 김효우金孝友이다.
울산군蔚山郡知事<하지돈河之沌>는 아들이 셋으로 맏이는 하징河澄인데 미성이며 나머지는 어리고, 딸은 셋인데 첫째는 장흥고주부長興庫注簿 성규成揆에게 시집을 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공조정랑工曹正郞<하지명河之溟>의 아들은 셋인데 큰 아들은 하충河冲인데 미성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두 딸도 아직 어리다.
풍저창주부豊儲倉注簿<하지행河之涬>는 한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학생學生<장경張慶>은 두 아들과 한 딸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부사정副司正<장필張弼>은 아들이 둘인데 모두 어리고, 네 딸을 두었는데 첫째는 학생學生 조전趙全에게, 다음은 풍저창주부豊儲倉注簿 정환鄭煥에게 시집을 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회인감무懷仁監務<김효우金孝友>는 한 아들을 두었는데 어리고 딸은 둘인데 첫째는 학생學生 정하鄭何에게 시집갔고 하나는 어리다. 사정司正<손번孫磻>은 아들이 둘이고 딸이 하나인데 모두 어리다. 증판사평공贈判司平公<하식河湜>의 차남은 전객령典客令을 지내다가 퇴로한 하거원河巨源인데, 여섯 분의 아들을 두었다. 맏이는 청천군菁川君 하을지河乙沚이고 둘째는 낭장郎將 하지숙河之淑이며, 군기감판사軍器監判事 하을부河乙桴, 중랑장中郞將 하을순河乙洵, 해령천호海領千戶 하을빈河乙玭, 전구서승典廐署丞 하을정河乙汀이고 딸은 둘인데 첫째는 선주지사善州知事 박응朴膺에게, 그 다음은 봉상령奉常令 강로姜璐에게 시집을 갔다. 서자庶子는 산원散員 하을생河乙生이고 서녀庶女는 학생學生 강시중姜時中에게 시집을 갔다.
낭장郎將<하지숙河之淑>의 아들은 별장別將 하렴河濂이며 딸은 셋인데 첫째는 협주지사陜州知事 최유강崔有江에게, 그 다음은 사재령司宰令 정신덕鄭新德에게 그 다음은 군위현감軍威縣監 정하손鄭賀孫에게 시집을 갔다. 군기감판사軍器監判事<하을부河乙桴>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개곡처사介谷處士 하취유河就濡, 그 다음은 공조전서工曺典書 하취동河就東, 상호군上護軍 하승해河承海, 부사직副司直 하승호河承浩이다. 중랑장中郞將<하을순河乙洵>의 아들은 사정司正 하굉河浤이며 따님은 학생學生 이지李芝에게 시집을 갔다.
해령천호海領千戶<하을빈河乙玭>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의정부녹사議政府錄事 하사호河斯浩이며 그 나머지는 어리고, 딸은 셋이었는데 첫째는 학생學生 강원립姜元)에게 시집을 갔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전구서승典廐署丞<하을정河乙汀>은 한 아들과 네 딸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선주지사善州知事<박응朴膺>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는 박보석朴輔石, 둘째는 박필석朴弼石인데 모두 미성이고 딸은 둘인데 첫째는 성균관주부成均注簿 하결河潔에게 시집을 갔고 그 다음은 미성이다. 봉상령奉常令<강로姜璐>의 아들은 사정司正 강안姜晏이다. 별장別將<하렴河濂>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가 학생學生 하축河蓄이며 나머지는 어리고 딸은 학생學生 황유黃瑜에게 시집을 갔다. 협주지사陜州知事<최유강崔有江>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호군護軍 최수생崔首生이고 차남은 의령현감宜
寧縣監 최중성崔仲成이며 딸은 생원生員 황근黃瑾에게 시집을 갔다.
사재령司宰令<정신덕鄭新德>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사직司直 정중산鄭仲山이며 나머지는 미성이고, 딸은 둘인데 첫째는 감무監務 모간牟侃에게, 다음은 의정부녹사議政府錄事 주봉의周鳳儀에게 시집을 갔다. 군위현감軍威縣監<정하손鄭賀孫>은 아들이 둘인데 큰아들은 정조鄭調이고 다음은 정장鄭獎인데 모두 미성이고 두 딸은 모두 어리다. 개곡처사介谷處士<하취유河就濡>의 두 아들 중 맏이는 학생學生 하함河涵이고 다음은 미성이다. 한 명의 딸은 어리다. 공조전서工曺典書<하취동河就東>의 아들은 부사정副司正 하제河堤이며 세 딸을 두었는데 첫째는 학생學生 배유문裵有文에게 시집을 갔고 나머지는 어리다. 상호군上護軍<하승해河承海>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는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 하경복河敬復이고 둘째는 칠원현감漆原縣監 하경리河敬履이다.
사정司正 <하굉河浤>의 아들은 다섯인데 맏이는 학생學生 하응河凝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좌의정공이 희중熙中에게, “근원은 같아도 분파分派되면 언젠가는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처럼 된다고 옛사람들이 슬퍼했던 것을 깊이 감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가 이미 선고先考와 그 자손을 빠뜨림 없이 썼는데, 게다가 같은 할아버지와 같은 증조부를 둔 형제와 자손을 기꺼이 함께 기록케 한 것은 이것을 후손들에게 보여서 서로 잊지 말게 하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비문에 이서서 이것을 비의 뒷면에 썼다.
같은 해 9월 갑신甲申에 박희중朴熙中 삼가 적다.
晉陽府院君河公諱允潾神道碑 陰記
左議政公庶女三長適谷山府使金秩次適中軍司直張希傑次幼。都摠制再娶司憲監察金音女生男福生幼。摠制男五長恭全供正庫副使次愼全司宰直長次誠全純全恒全皆幼女一幼。大護軍 娶門下侍中李公諱成林庶女生男繼生幼女一幼。谷山生女二長適義盈庫副直長都以恭 一幼。司直生男美幼女二皆幼。正郞 娶中郞將金台俊女 生男惠生弱 女二 長適學生姜汝爲 一幼, 再娶龍潭縣令鄭汝海女 生男三 長孝山弱 餘幼 女一幼。贈右政丞公 次男宗簿令諱允丘 女二 長適郞將張蘊 次適密直副使李守。宗簿男撿校漢城尹游。郞將男撿校漢城少尹翼 女適司僕副正金南甲。密直女適星州牧使河有宗。漢城男四 長漢城少尹之混 次知蔚山郡事之沌 工曺正郞之溟 豊儲倉注簿之涬。撿校少尹男三 長學生慶 次副司正弼 次弱 女適司正孫磻。副正男懷仁監務孝友。蔚山男三 長澄弱 餘幼 女三 長適長興庫注簿成揆 餘幼。正郞男三 長冲弱 餘幼 女二幼。注簿男一女二皆幼。學生男二 皆弱 女一幼。副司正男二 皆幼 女四 長適學生趙全 次適豊儲倉注簿鄭煥 餘幼。懷仁男一幼 女二 長適學生鄭何 一幼。司正男二 女一皆幼。 贈判司平公次男典客令致仕諱巨源 男六 長菁川君諱乙沚 次郎將之淑 判軍器監事乙桴 中郞將乙洵 海領千戶乙玭 典廐署丞乙汀 女二 長適知善州事朴膺 次適奉常令姜璐 庶男散員乙生 庶女
適學生姜時中。郎將男別將濂 女三 長適知陜州事崔有江 次適司宰令鄭新德 次適軍威縣監鄭賀孫。判軍器男四 長介谷處士就濡 次工曺典書就東 上護軍承海 副司直承浩。中郞男司正浤 女適學生李之。千戶男四 長議政府錄事斯浩 餘幼 女三 長適學生姜元立 餘幼。廐丞男一女四皆幼。善州男二 長輔石 次弼石 皆弱 女二 長適成均注簿河潔 次弱。奉常男司正晏。別將男四 長學生蓄 餘幼 女適學生黃瑜。陜州男二 長護軍首生 次宜寧縣監仲成 女適生員黃瑾。司宰男三 長司直仲山 餘弱 女二 長適監務牟侃 次適議政府錄事周鳳儀。軍威男二 長調 次獎 皆弱 女二皆幼。介谷男二 長學生涵 次弱 女一幼。典書男副司正堤 女三 長適學生裵有文 餘幼。上護軍男二 長左軍同知摠制敬復 次漆原縣監敬履。司正男五 長學生凝 餘幼。左議政公謂熙中曰 同源分派 遂成路人 古人所悲 可不深以爲感哉。子旣書先考子孫 無遺矣。同祖同曾祖兄弟子孫 勿憚幷書 以示來裔 使之不相忘也。於是 續書之
是年九月甲申。朴熙中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