襄靖公 河敬復 神道碑文
조선왕조 오백년간 내치외교內治外交에 걸쳐 가장 국력이 신장伸長되고 민족문화의 흥륭興隆을 이룩했던 시기는 세종대왕 어우御宇 삼십년 동안이다. 이러한 치평治平의 성과는 당시의 경제와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여 남경북완南梗北頑의 외우外憂를 해소시킬 수 있었던 데서 온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時期에 풍운風雲의 제회際會로 수많은 영호현철英豪賢哲의 장상將相들이 중외中外에 활약하여 각기 그 포부와 역량을 당대에 유감없이 발휘하고 그 경륜사업이 후세에 길이 명성名聲을 떨치는 이가 많았다. 숭정대부 의정부 찬성사 하河 양정공襄靖公 휘 경복諱敬復은 곧 그 중의 한 분이다.
1377년 고려 우왕 3년에 경상도 진주 서면 이하리 지금의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서 부父 서운관 부정書雲觀副正 증 병조판서 휘諱 승해承海와 모母 보성寶城 선씨宣氏의 장남으로 탄생誕生한 공公은 남다른 천품天稟으로 어려서부터 영채映彩가 발월發越하였다. 경상도의 저성著姓인 진양하씨는 고려 전기의 유명有名한 사절신死節臣 휘諱 공진拱辰을 시조始祖로 하여 그 후 대대로 잠영문인簪纓聞人이 사첩史牒에 휘영輝映하였고, 조선의 건국建國과 더불어 가문이 더욱 왕성旺盛하였으니 좌명공신 문충공 호정佐命功臣文忠公浩亭 휘 륜諱崙은 바로 공公의 종조숙부從祖叔父였다. 이와 같은 문운文運의 비창丕昌은 공公을 또한 일세의 위인偉人으로 진취進就케 하였다. 소년 시절 이미 여력膂力이 절인絶人하고 사어(射御)에 능하여 일찍 간곡澗谷에서 사냥을 하다가 뛰어든 맹수猛獸를 겨드랑이에 끼고 목을 눌러 물속에서 죽게 하니 이로부터 신용神勇으로 알려졌다. 무과武科를 거쳐 갑사甲士로 숙위宿衛할 때에 궁중宮中으로 진상進上되는 분매盆梅의 꽃 한 가지를 꺾어 버리면서 “기화이식奇花異植은 인군人君의 상지지물喪志之物이니 지금 북로北虜가 준동蠢動하여 어느 때보다 유용有用한 인재를 급급히 구해야 할 때에 어찌 이런 물건을 애완愛玩할 여가餘暇가 있겠는가.” 라고 말하여 임금이 듣고 크게 기이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1410년太宗10 중시무거重試武擧를 치른 뒤에 첨총제僉摠制에 초수超授되고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그해 5월에 길주조전지병마사吉州助戰知兵馬使로 되었다가 6월에 경원병마사慶源兵馬使로 옮겼으며 뒤에 경성등처병마절제사鏡城等處兵馬節制使에서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와 삼군도진무우군총제三軍都鎭撫右軍摠制를 거쳐 곧 함길도병마절제사咸吉道兵馬節制使로 임명任命되었으니 이것이 15년간 북방北方에 있어서의 공公의 훌륭한 주략籌略의 운용運用과 뛰어난 노적勞績의 달성 과정過程이다.
원래 여진족女眞族은 고려 초부터 우리 함경북부 일대에 점거(占居)하여 계속 문제를 일으켜 왔는데 한때 윤관尹瓘의 정벌征伐을 통하여 구성九城을 쌓은 적도 있었으나 여진女眞의 세勢에 밀려 그 땅을 도로 내어주었더니 조선朝鮮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눌러 살면서 틈만 있으면 구략寇掠을 일삼았다. 일찍 조정朝廷에서 여진女眞을 물리치고 육진六鎭을 설치할 것을 의론한바 있었는데 정신廷臣들은 모두 그것을 어렵게 생각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이에 공公은 말하기를 “북방산천北方山川은 천험지고天險之固가 있고 군사軍士와 말이 또한 정강精强하니 무슨 두려움이 있는가, 축성築城과 설진設鎭은 꼭 필요한 일이다.” 라고 하여 북방개척北方開拓의 열의熱意를 보였다. 공公은 부임하자 인자仁慈스럽게 사병士兵을 보살피고 위엄威嚴스럽게 노적虜賊을 제어制禦하여 우리 강역疆域의 확보確保와 변경邊境의 진정鎭靜 그리고 주민들의 생활 정착定着에 결정적 전기轉機를 마련하였는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중요 사실 몇 가지만 든다면, 세종 4년 9월과 10월에 혐진올적합嫌眞兀狄哈과 올양합兀良哈이 차례로 입구入寇하였는데 공公은 먼저 올양합兀良哈에게 사람을 보낸 강은양법强隱兩法으로 설유說諭하여 피로被擄된 경원지방慶源地方의 인축人畜을 쇄환刷還시키는 한편 건주좌위지휘동맹가첩목아建州左衛指揮童猛哥帖木兒가 정군正軍 일천과 부인 소아공小兒共 육천六千을 이끌고 고경원古慶源에 입주하려는 것을 엄嚴히 거절拒絶하여 마침내 아목하阿木河로 돌아가게 하였다. 다음해 9월에 혐진올적합嫌眞兀狄哈이 다시 대군으로 경원고량기慶源高郞岐 등 처處에 입구入寇하는 것을 공公이 선두先頭에 나서서 친親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영격迎擊하여 패주敗走시키니 적賊의 인축궁전人畜弓葥 등을 노획擄獲한 것이 심다甚多하였다. 세종대왕은 공公의 큰 공功을 기리는 한편 노모老母의 곁을 오래 떠나있게 된 공公의 심정心情을 체념體念하여 멀리 진주로 그 모부인에게 능견綾絹 각 일필一匹과 쌀 삼십 석을 보내고 이어 내관 한홍韓弘을 시켜 공公에게 어찰을 전하여 그 사실을 알리면서 북방 문제에 공公을 장성長城처럼 의중倚重하고 있음과 임기任期가 지나도 교체시킬 수 없는 고충苦衷을 말하였다. 2년 뒤 6월에 왕은 다시 모부인에게 쌀 삼십석을 보내고 호군 홍사석洪師錫) 공公에게 파견하여 궁온宮醞 이백십병과 내구마內廐馬 일필一匹 의복 일습一襲 및 입화笠靴 등을 선사宣賜하면서 저번 어찰御札에서와 같이 모부인母夫人을 시봉侍奉하지 못함을 위로하는 간독한 편지를 내렸다. 그리고 공公의 아우 휘 경리敬履를 진주晉州 부근 구읍九邑에 차례로 수령직守令職에 안처하여 전성專城의 장長으로 삼고 모부인母夫人을 봉양케 함으로써 공公이 안심安心하고 주변籌邊에 전념할 수 있게 하였다. 세종 9년 3월에 의정부 참찬參贊에 오른 공公은 10년 정월에 비로소 환경폐견還京陛見하여 왕명으로 고향에 계신 모부인에게 귀근歸覲하였다. 수월數月 만에 또 임지로 향발向發하게 되었는데, 왕은 예조禮曺로 하여금 전송케 하고 승지대언承旨代言 등으로 하여금 내선內饍으로 대접케 하는 한편 경상도감사慶尙道監司에게 전지傳旨하여 모부인에게 또 쌀 삼십석을 내리고 위로의 잔치를 베풀게 하였다. 그 뒤 세종 14년 내직에 들어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승진되고 다음해에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로 나갔다가 2년 만에 다시 의정부 찬성겸의금부제조議政府 贊成兼義禁府提調가 되었는데 이 기간에 정흠지鄭欽之 황보인黃甫仁등과 함께 진서陣書를 편찬編纂하기도 하였다. 한때 함길도도순검사咸吉道都巡檢使로 나갔다가 기민飢民의 실태를 보고함에 있어서 숫자의 착오가 있다는 이유로 파직 귀향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곧 경상우도 병마도절제사慶尙右道兵馬都節制使로 기용起用되게 되었는데, 모부인의 봉양에 편리케 함이었다. 62세가 되는 1438년세종20 8월에 별세하니 도인사녀都人士女가 항곡정시巷哭停市하였고 왕은 조관朝官에게 특명하여 공公의 거제居第 서쪽 수리數里 밖에 있는 백석동白石洞 오향지천午向之阡에 예장禮葬으로 묻게 하였다. 공公의 거제居第는 원래 모옥茅屋 수간數間이었는데 가인家人이 공公의 봉록俸祿을 비축備蓄하여 새집을 웅장하게 지었던바 공公은 고향에 돌아와 그것을 보고 크게 노하여 즉시 철거하라고 명하였다. 자서子婿와 인리隣里의 간청으로 그대로 두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것만을 보아도 공公의 소지素志의 존尊한 바를 알 것이다. 배 정씨와의 사이에 일남 일녀를 두었는데 남男은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시諡강장剛莊인 한漢이요 여女는 참판 허영許瑛에게 출가하였다. 강장剛莊은 사남 일녀두었는데, 장長은 녹사錄事 맹보孟溥요, 차次는 종사랑從仕郞 중보仲溥요, 차次는 아경亞卿을 거쳐 자헌지중추資憲知中樞로 시諡경절敬節인 숙보叔溥요, 계季는 장령掌令 계보季溥이며, 여女는 찰방察訪 조지륜趙智崙에게 출가하였다. 오호嗚呼라. 공의 일생을 결산하여 태상太常에서 시호諡號를 양정襄靖이라 했으니 갑주유로甲冑有勞와 유덕안중柔德安衆의 뜻이다. 죽백竹帛에 실려 천추千秋에 빛날 높고 거룩한 자취가 오직 그의 청백입신淸白立身에서 온 것 것임을 누가 알리요, 여기 짧은 송사로써 명銘에 대신해 둔다.
남복南服에서 태어난 위인偉人이 북방北方에서 큰 일 하였네. 남북하산南北河山이 하나로 트여지는 날 진양의 상서祥瑞로운 구름은 누리에 덮이리다.
1985년 乙丑 重陽節 文學博士 驪州 李佑成 謹撰
1986년 丙寅 淸明節 傍後孫 漢鎭 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