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洲公 河忭 事蹟碑文
丹洲公 河忭 事蹟碑文
아아! 선조 삼십년 1597에 우리는 왜倭의 침략을 거듭 당하고 전통기강傳統紀綱을 다시 무너뜨리니 역사는 이를 정유재란이라 칭한다. 위치상으로 영우지방嶺右地方이 가장 화를 많이 받게 되었으니, 지智와 용勇을 다 동원하여 총력을 기울인 당시의 형세를 어찌 명기할 수 있겠는가! 진주의 절의사 단주선생節義士 丹洲先生은 당년 십칠세로 침입한 적에게 체포逮捕되어 동후洞后의 숲속에서 피란중인 가족과 이별할 때의 그 참상慘狀을 어찌 필설筆舌로 형용하겠는가! 한번 적에게 끌려간 공은 즉시 일본으로 압송壓送되어 갖은 곤욕困辱을 겪었으나 여하如何한 협박脅迫과 유혹誘惑에도 의義를 지켜 불굴하니 적 또한 최후의 엄벌을 결행決行하려다가 공의 위인爲人을 살펴보니, 용모容貌가 탁출卓出하고, 재지才智가 영특英特하며, 문사文詞 또한 발중拔衆하므로 마음을 바꾸어 보려고 그 대접待接을 후厚하게 하였건만, 공은 적의 유인誘引을 감지感知하고 부동不動하자, 적은 도끼와 칼로 위협하였다. 그러나 공은 태연히 불변不變하니, 적 또한 별안간에 굴하지 않음을 예측하고, 이때부터 관대款待하여, 문득 해도海島에 체류滯留케한 삼년만에, 관대히 철귀撤歸시키고 다시 구속하여 대판大阪에 이르러, 관백關伯 풍신수길豊臣秀吉의 관에 거居하게 한 후 의식주를 고관高官과 같이 예우禮遇하였다. 수월數月을 지나 하루는 관백關伯이 추장酋長에게 명하여  설연設宴하게 하고, 은근히 이르기를, 전일 귀국에 있을 때는 항절抗節을 상정으로 여겼으나, 이제는 산 같은 파도가 만 겹으로 솟구치니, 날개를 가진들, 비공飛空할 수 있겠는가. 사생 또한 막중한 일, 내말을 들으면, 부귀가 면전에 다가온다. 반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공이 정색正色하고 이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