丹池公 河悏 事蹟碑文
나무는 뿌리가 깊고 튼튼해야 가지와 잎이 무성茂盛하듯이, 한 가문도 현조顯祖를 근원으로 삼아 화목해야만 번성繁盛할 수 있다. 진주 단목리에 세거하는 단지丹池 하공河公의 후손들은 공을 정신적 근원으로 삼아 화목하게 살아오고 있으니, 장래將來의 번성繁盛을 예측할 수 있다. 단목의 진양 하씨는 시례詩禮를 세전世傳하고 효우를 돈수敦守해 온 통국通國의 성벌盛閥로서 역사상 많은 명공홍유名公鴻儒가 뇌락상망磊落相望하였다.
단지공丹池公의 휘諱는 협悏. 자字는 자기子幾, 단지丹池는 후인들이 올린 존호尊號다. 그 시조는 고려 현종조顯宗朝의 충절신忠節臣 휘諱 공진拱辰인데, 거란契丹에 억류抑留되었으나 항굴降屈하지 않고 순국殉國하였다. 문하시랑중서평장사門下侍郞中書平章事에 추증追贈되었다. 그 후손 휘諱 우치禹治는 통훈대부通訓大夫 안주목사安州牧使인데 공公의 증조曾祖이다. 왕고王考 휘諱 숙淑은 승사랑承仕郞이고 황고皇考 휘諱 위보魏寶는 증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이조판서贈純忠輔祚功臣資憲大夫吏曹判書로 진평군晉平君에 봉해졌다. 황비皇妣는 사천이씨泗川李氏로 참의參議 륜綸의 따님과 진양강씨晉州姜氏 이조참의吏曹參議 우佑의 따님이다. 조선朝鮮 선조宣祖 十六(1583)년 계미癸未에 강씨부인姜氏夫人이 공公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품자稟資가 영오英悟하고 재기才氣가 절륜絶倫하였다. 유시幼時에 부모父母를 잃었으나 능히 스스로 호학불권好學不倦하였다. 겨우 십세十歲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만났으나 난리중亂離中에도 덕행德行을 닦고 학문學問에 힘썼다. 효우孝友가 천성天性에서 우러나왔으니, 모부인母夫人이 난중亂中에 작고作故하여 장례葬禮를 조촐하게 치를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늘 죄괴감罪愧感을 갖고서 의식衣食을 검박儉薄하게 하여 비용費用을 마련하여 이장移葬하여 유감遺憾이 없도록 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바로 위 형兄 단주丹洲(忭)가 왜倭에 납치拉致되어 갔는데, 공公은 주야晝夜로 견권繾綣하며 안타까워하였다. 일본日本가는 사행使行이 있게 되면, 공公은 매번每番 부산釜山으로 가서 지성至誠으로 읍청泣請하며 서신書信을 부쳐 보냈다. 마침내 연락聯絡이 닿아 이십일년二十一年만인 정사년丁巳年에 귀국歸國하게 되었다. 다섯째 형兄 창주滄洲 증憕을 엄부嚴父처럼 존경尊敬하며 따랐고. 창주滄洲도 각별恪別히 사랑하여 지교指敎하였다. 지조志操가 정결貞潔하고 식견識見이 명민明敏하였고, 언행言行을 법도法度에 맞게 하였고, 의리義理를 숭상崇尙하였는데, 당시 유림儒林에서 명성名聲이 높았다. 이십삼세二十三歲 때 진사進士에 합격合格하였으나 북인北人들의 천전擅專을 보고는 과환科宦을 단념斷念하고 일체一切의 권리勢利를 잊고 임하林下에서 독서讀書하면서 자락自樂하였다. 그러나 잠시暫時도 국가國家와 민생民生을 잊고 혼자만 결신장왕潔身長往하려 한 적은 없었다. 대북정권大北政權의 패륜적悖倫的 정사政事에 대해서 일곱째 형兄 죽헌竹軒 성惺과 더불어 상소上疏하여 항론抗論하니 사림에서 칭탄稱歎하였다. 공公 같은 간세지재間世之材가 치세治世를 만났더라면 묘당廟堂에서 경륜經綸을 펼쳐 국가國家 민족民族에 공택功澤을 끼칠 만했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고 생生을 마쳤으니, 후인後人으로 하여금 탄석歎惜을 금禁치 못하게 한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以後에는 사진仕進할 수 있었으나 지절志節을 지키다가 인조仁祖 3 1625년 을축乙丑 시월十月에 서세逝世했는데 춘추春秋 겨우 사십삼세四十三歲인지라 사우士友들이 모두 통석痛惜해 마지않았다. 진주晉州 지수면智水面 용봉리龍鳳里 동지東旨 자좌子坐의 언덕에 안장安葬하였다. 배위配位는 진주정씨晉州鄭氏로 생원生員 승훈承勳의 따님이고, 묘墓는 합폄合窆이다. 삼남三男 삼녀三女를 두었으니, 아들은 구이당具邇堂 달영達永, 달천達天, 진사進士 달한達漢이고, 따님은 조징성趙徵聖, 윤재尹載, 윤대尹戴에게 출가出嫁 하였다. 손자孫子는 현灦, 주澍, 호군護軍 형浻, 설渫이다.현灦의 사남嗣男은 형浻의 아들 윤관潤寬인데 통덕랑通德郞이다. 이후以後 자손子孫이 번연蕃衍하여 이루다 수재收載하기 어럽다.
아아! 공公은 남명선생南冥先生의 경의敬義의 학맥學脈을 계승繼承하여 의리義理에 밝고 실천實踐에는 민첩敏捷하였다. 공公의 형제兄弟와 자손子孫들은 덕천서원德川書院의 원장院長 혹或은 원임院任으로서 수백년간數百年間 강우江右의 유론儒論을 주도主導하였기에, 세교世敎에 끼친 영향影響이 지대至大하였다. 공公은 원래原來 많은 시문詩文을 저작著作했으나, 대부분 일실逸失되어 오늘날 전존傳存 하는 것은 영성零星하지만, 그 청신유량淸新瀏亮하고 돈좌기굴頓挫奇崛한 조예造詣는 용속庸俗한 부류部類들이 감敢히 기급企及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서법書法에도 능能하였는데 아건雅健한 경지境地는 탈속脫俗의 기운이氣韻이 있다.
공公의 후손後孫들은 하씨河氏 여러 문중門中 가운데서도 가장 번성繁盛한데, 오늘날에도 정계政界 재계財界 교육계敎育界 등 각各 방면方面에서 활약活躍하는 인재人材들이 제제濟濟하다. 정치학政治學 박사博士로 사선四選 국회의원國會議員을 지낸 순봉舜鳳은 십삼대十三代 종손宗孫인데 가문家門의 근간根幹으로서 융창隆昌을 주도主導하고 있다. 공公이 당일當日 종덕種德한 결실結實이 면면綿綿히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석前昔에는 후손後孫들이 동족촌同族村 단목丹牧에서 숭조목족崇祖睦族하며 살아왔으나, 산업화시대産業化時代가 도래到來함으로 인하여 생업生業을 쫓아 각지各地로 산거散居하게 되어 유서由緖 깊은 유가儒家의 풍운風韻이 점차漸次 인멸湮滅되게 되었다. 세월歲月이 더 흘러가면 일족一族이 환취歡聚하기가 쉽지 않아 가까운 친족親族도 남처럼 될까 우려憂慮 하던 차次에, 공公의 승복승馥이 서려 있는 지내池內 광풍대光風臺 제월정霽月亭 아래 숭비崇碑를 건립建立하여 그 사적事蹟을 각재刻載하자는 논의論議를 계선啓先이 수창首唱하자, 제손諸孫들이 적극積極 호응呼應하였다. 이에 추진위원회推進委員會를 구성構成하여 일에 착수着手하니, 각지各地의 후손後孫들이 다투어 헌성獻誠해 와 거역巨役이 순조順調롭게 진행進行될 수 있었다. 이 비석碑石은 공公의 사적事蹟을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차將次 객거客居하는 자손子孫들의 정신적精神的 고향故鄕이 되어 단지문중丹池門中의 구심점求心點 역할役割을 하게 될 것이다. 비재碑材가 갖추어지자 위원장委員長 계동장啓東丈 등等이 관계關係 문적文籍을 갖추어 불녕不佞에게 청문請文하였다. 불녕不佞이 평소平素에 공公의 학행學行에 관심關心을 두고 있었고, 또 그 후손後孫들의 존조尊祖의 효침孝忱에 감동感動하여 서술여우敍述如右하고 끝에 명銘을 붙인다.
송백松柏같은 그 기절氣節에, 금옥金玉같은 그 행신行身은. 선비정신精神 귀감龜鑑으로, 군학중群鷄中에 일학一鶴이라. 구세救世 위爲한 장지壯志 품고, 큰 경륜經綸을 온축蘊蓄했네. 정국政局 혼미昏迷 어이하랴? 외모外慕 끊고 내행內行 닦아 양성종덕養性種德 그 결과結果로 자자손손子子孫孫 번창繁昌히니, 이 모두가 공公의 이모貽謨. 의당宜當할사 음수사원飮水思源, 후손後孫 효침孝忱 결집結集하여 사적事蹟새겨 궁비穹碑 건립建立. 퇴폐頹廢해진 이 세상世上에, 인륜회복人倫恢復 도움 되리.
丙戌(2006)年上元日에 文學博士國立慶尙大學校敎授金海許捲洙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