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공 하륜선생 연보文忠公河崙先生年譜
문충공 하륜선생 연보文忠公河崙先生年譜
1347년忠穆 3,  1세
       12월 22일 기축己丑일 진주 비봉산 아래서 탄생하다
1356년恭愍 5, 10세
       취학하다.
1360년恭愍 9, 14세
       국자감시國子監試座主-杏村 李嵒에 합격하다.
1365년恭愍14, 19세
       문과에 급제하다.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과 목은牧隱 이색李穡 선생이 그 좌주座主 였다.
1367년恭愍 16, 21세
       춘추관 검열檢閱이 되고 이어 공봉供奉으로 승진하다.
1368년恭愍 17, 22세
       감찰사 규정糾正이 되다.
1369년恭愍18, 23세
            감검수사監檢收司로 신돈辛旽의 문객인 양전부사量田副使를 탄핵하여 신돈의 미움을 받아 파직당하다.
1371년恭愍 20, 25세
       신돈辛旽 주살 후 지영주군사知榮州郡事로 제수되다.  
1372년恭愍 21, 26세
       고공사考功司 좌랑이 되다.
1373년恭愍 22, 27세
       판도사版圖司 좌랑으로 교주강릉도 찰방사가 되다.
1374년恭愍 23, 28세
       제능서諸陵署 령令에 제수되다.
1375년禑王 1,  29세
      사헌부 지평을 거쳐 전리사典理司 좌랑에 제수되다.
1376년禑王 2, 30세
       전교시典校寺 부령副令으로 지제교知製敎가 되었으며 곧 전의시典儀寺 부령
       副令으로 자리를 옮기다.
1377년禑王 3, 31세
       전법사典法司 총랑摠郞을 거쳐 보문각 직제학으로 지제교를 겸하다. 판도사 총랑으로 교주도 안렴사가 되다.
1378년禑王 4, 32세
       전리사典理司의 총랑摠郞에 전보되다.
1379년禑王 5, 33세
       전교시典校寺 영令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다.
1380년禑王 6, 34세
       아들 구久가 태어나다. 9월 24일 부친상을 당하여 12월 갑신일에 오방동 감산 조비祖妣 묘墓하에 장사葬事지내다.
1381년禑王 7, 35세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기복출사起復出仕의 명을 받았으나 부친상을 마칠것을 아뢰어 허락받다.
1382년禑王  8, 36세
       3년 상을 마치고 밀직사 우부대언에 제수되다.
1383년禑王  9, 37세
      우대언右代言을 거쳐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가 되다
1384년禑王 10, 38세
       다시 밀직사密直司에 들어가 제학이 되다.
1385년禑王 11, 39세
       밀직사 첨서사사僉書司事에 승진되다. 사은사謝恩使로 경사京師에 다녀오다.
1387년禑王 13, 41세
       밀직사 동지사사同知司事로 자리를 옮기다.
1388년禑王 14, 42세
           최영崔瑩의 요동정벌을 반대하다가 양주로 귀양 가다. 위화도 회군 이후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오다.
1389년昌王 1, 43세
      봄에 동지사사로 복직되었으나 가을에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의 옥사’에
      무고죄로 유배되었다가 11월 공양왕 즉위 후 ‘김저金佇 사건’에 연루되어 울주로 이배移配되다.
1390년恭讓王 2, 44세 :
      윤이․이초의 옥사에 연루되어 청주로 이배되었다가 정몽주의 노력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진주로 돌아오다.
1391년恭讓王 3, 45세
       6월 전라도도관찰출척사에 제수 되다.
1392년太祖元年, 46세
      무일편無逸篇’과 ‘입정편立政篇’을 쓴 족자를 공양왕께 바쳐 공양왕의 치도治道가 계속되기를 기원하다. 7월 17일 태조가 왕위에 오르다.
1393년太祖 2, 47세
     비개국파에 대한 회유책이 실시되자 권근 등과 함께 조선 왕조에 참여하여 9월에 경기좌도관찰사에 제수되다. 12월 계룡산 천도역사를 간하여 중지하게 하다.
1394년太祖 3, 48세 
     첨서중추원사에 제수되다. 
1395년太祖 4, 49세
     4월 중추원사에 제수되고, 7월 5일 모친상을 당하다.
1396년太祖 5, 50세
     4월 예문춘추관학사藝文春秋館學士에 제수되다. 한성윤으로 계품사啓稟使가 되어 표전表箋의 시말始末을 주달奏達하다.
1397년太祖 6, 51세
     정도전의 미움을 받아 계림부윤鷄林府尹으로 밀려나, ‘박자안의옥사’에 연루 되어 수원에 안치되었다가 10월에 풀려나다.
1398년太祖 7, 52세
     7월 충청도 도관찰출척사에 제수되다.
     8월 ‘1차 왕자의 난’에 정안군을 도와 9월 상왕定宗이 즉위하게 되어 정당문학에 제수되고 지경연사를 맡았으며, 10월 정사일등공신定社一等功臣에 책록 되고 진산군의 작위를 받다. 12월 좌정승 조준과 함께『사서절요四書切要』를 찬술하다.
1399년定宗 1, 53세
     진위사로 경사京師에 가서 돌아올 때 정종의 왕위승습 칙허를 받아오다.       12월 참찬문하부사가 되다.
1400년定宗 2, 54세
    정월에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난이 평정된 후 2월 정안군 이방원을 세자로 세울 것을 청하다.
    4월 문하시랑찬성사로 관제개혁을 주도하면서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쳐 왕권을 강화하다.
    5월 판의흥삼군부사 겸 판상서원사가 되다.
    9월 문하우정승 판병조사가 되고 진산백의 작위를 받다.
1401년太宗 1년, 55세
     1월 좌명공신일등에 책록 되고 진산부원군의 작위에 오르다. 4월 영삼사사로 제수되고 지공거로 윤회 등 33인의 복시에서 조말생을 제1로 뽑다. 7월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가 되어 저화楮貨를 만들게 하였고, 11월 신문고申聞鼓 설치를 건의하다.
1402년太宗 2, 56세
     8월 이씨 왕조를 예찬한 ‘조선성덕가朝鮮盛德歌’ 12장을 올리고, 10월 의정부좌의정 판이조사에 제수되어 명나라 영락 황제의 하등극사賀登極使로
     떠나다.
1403년太宗3, 57세
     4월 명나라 황제로부터 고명(誥命)‧인장(印章) 칙서勅書를 받아 사신 도지휘都指揮 고득高得과 함께 돌아오다. 8월 권근權近 이첨李詹과 함께『동국사략』을 찬수하다. 9월 병으로 휴가를 얻어 고향진양에 왔다가 10월 상경上京하니 임금이 청화정淸和亭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다.
1404년太宗 4, 58세
     6월 가뭄으로 인하여 책임을 지고 정승 직책을 사임하다.
     9월 도읍을 한양의 무악으로 옮길 것을 다시 청하다.
     12월 영춘추관사로 권근과 함께 관제개혁을 주도하다.
1405년太宗 5, 59세
     1월에 좌정승이 되고 세자 사부가 되다. 사원을 혁파하여 국가 재정을 늘리다.
1406년太宗 6, 60세
     좌정승 겸 판이조사로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다.
1407년太宗 7, 61세
     친시親試 독권관讀卷官이 되어 변계량 등 10인을 뽑다.
     7월 재이災異로 좌정승을 물러나 8월『속육전』수찬소를 관장하다.
1408년太宗 8, 62세
     2월 영의정부사‧세자사世子師에 제수되다.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도감제조都監提調로 국장國葬을 총괄하다.
1409년太宗 9, 63세
     8월 영의정부사를 물러나 영춘추관사로 변계량 등과 태조실록  편수사업을 시작하다. 10월 영의정부사가 되다
1410년太宗10, 64세)
     2월 30일 임금의 명을 받아 ‘월령’을 편찬하여 백성들도 쉽게 알도록 하다.
1411년太宗 11, 65세)
     4월 지공거로 권극중 등 33인을 뽑다. 
     6월 목은 이색 선생의 비문 내용 때문에 권근과 함께 대불경지죄 大不敬
      之罪로 탄핵받아 물러났다가 8월 다시 영의정부사가 되다.
1412년太宗 12, 66세)
     5월 경복궁의 새 누각新樓이 완성되니 경회루라 명명하고 6월에 그 기문을 지어 올리다. 8월에 좌의정이 되다.
1413년太宗 13, 67세
     왕명으로 군‧현의 이름 중 주州를 모두 산山과 천川으로 고쳐 부르게 하니
     영주寧州를 영산寧山 금주衿州를 금천衿川으로 고친 것이 그 예이다.
1414년太宗 14, 68세 
     3월 영춘추관사로 독권관이 되어 조서강 등을 복시覆試하였는데 임헌臨軒하여 방방放搒할 때 정인지를 1등으로 뽑다.
     4월 의정부의 기무機務를 혁파하고 6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하게 하여 영의정부사에 제수되다
1415년太宗 15, 69세
     진산부원군으로 물러났다가 10월에 좌의정이 되다.
1416년太宗 16, 70세
     4월 경승부윤敬承府尹 변계량에게 선묘先墓의 신도비 명문銘文을 짓게 하고 직예문관 박희중으로 쓰게 하였는데, 이들의 직급이 낮아 임금에게 청하여 변계량에게는 수문관제학을, 박희중에게는 제교겸춘추관기주관記注官을 더하게 하다.
     5월 나이 70에 치사致仕하는 법의 시행을 청하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다.
     10월 선왕先王의 능침을 순심巡審하기 위해 제산릉고증사諸山陵考證使로 함길도로 떠나다. 임금이 선암鐥巖에 나가 전송하니 서자庶子 장長을 임금에게 뵈이고, “청컨대 장長과 그 아우 연延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였다. 세자는 동교東郊에서 전송하다. 
     돌아오는 길에 병을 얻으니 좌군도총제 구久가 아비의 시병侍病을 청하니 역마를 주어 보내고 서자庶子 영永도 시병侍病하였다. 11월 6일 계사에 정평 관아官衙에서 졸卒하니 예조좌랑 정인지를 보내어 사제賜祭하였고 호상護喪하여 한양 집에 빈소를 차리다. 11월 26일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 이승간이 장인의 빈소에 전奠을  드리기 위해 상경을 청하여 허락 받다.
     12월 2일 세자가 진산부원군의 빈소에 제사지내고, 12월 8일에는 임금께서 친히 진산부원군의 빈소에 임하여 사제賜祭하다. 부인 이씨가 유언을 좇아 국장國葬을 없애고 왕명으로 국장도감에서 내린 부물賻物도 사양하고 받지 않다.
1417년太宗 17
     3월 11일 아들 좌군도총제 구久가 진주 오방동 선영하에 장사 지내다.
     6월 24일 상중喪中에 병에 걸린 아들 구久를 위해 부인 이씨가 아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상上께 허락을 청하니 고기를 내려주다.
     10월 19 일 아들 구久가 상喪을 마치지 못하고 병들어 졸卒하니 시호를 안평安平이라 내렸다.
1420년世宗 2
     상왕이 주연酒筵에서 “내가 조준을 아끼는 것이 하윤을 아끼는 것만 못하니라” 하였다.
1421년世宗 3
     1월 19일 진한국대부인 이씨가 졸卒하니 상왕이 내신內臣을 보내 제사를 내리었다.
1424년세종 6
     2월 6일 진산부원군 하륜, 한산부원군 조영무 등 5인을 태종의 배향공신配享功臣으로 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