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락(河洛)
1583년 (宣祖16年) 癸未 8月 5日 甲寅
이이(李珥)의 군정이 정당한 일이었으며 삼사가 지나쳤다고 하는 상소문
왕자사부(王子師傅) 하락(河洛)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신은 일개 산야(山野)의 사람으로 오은(誤恩)을 입고서 몇 해를 도하(都下)에 있으면서 격일로 사석(師席)에 나가는데, 공무에서 물러와서는 두문불출할 줄만 알고 교유(交遊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조정의 이해(利害)와 인물의 현부(賢否)에 대해서는 들은 바도 없고 말하지도 않은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삼사(三司)가 있는 힘을 다해 입을 모아 전 판서(判書) 이이(李珥)를 공격하였으므로 이이가 몸을 끌고 물러가 호연(浩然)히 돌아갔다고 들었는데 이는 바로 이이로서는 다행한 일이요 조정으로서는 크게 불행한 일입니다.
이이의 사람됨이 어떠한지 신으로서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일찍이 친구들의 서로 전하는 말을 통하여 듣건대, 그의 사람됨이 성현(聖賢)의 글 읽기를 좋아하고 뜻을 돈독히 하고 실천을 힘쓰며 몸가짐과 마음 검속에 있어 오직 고인古人을 사모하다가 급기야 세상에 등용되어 성상이 마음을 기울이고 소민들이 크게 기대하게 되자, 그는 몸을 나라에 바칠 생각으로 마음과 힘을 다하여 위로는 곤직(袞職)을 돕고 아래로는 창생(蒼生)을 구제하기 위하여 모든 시설(施設)에 있어 폐단을 없애기에만 힘써 시속과 저촉되는 것도 불고하였고, 백성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하여 구습(舊習)을 따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마침 북방 변경의 급한 상황을 당하여 하관의 장[夏官長] 1053 이 된 몸으로 군마(軍馬) 조발과 양향(糧餉) 운반을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요컨대 변방을 튼튼히 하여 적병狄兵을 제어하는 일로서 이는 이이가 자신이 배운 것을 실천하고 또 성상의 지우(知遇)에 보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비록 소루(疏漏)와 과오(過誤)를 범한 일이 혹 있기도 하였겠지만 그의 본심이야 어찌 고의적으로 전도(顚倒)와 변란(變亂)을 일으킴으로써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게 하려는 것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언관(言官)들은 번갈아 상소하여 논핵(論劾)하되 처음에는 그의 실책만을 조금 거론하다가 끝에 가서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중한 말들을 하였으며, 옥당(玉堂)의 차자와 간원(諫院)의 사장(辭章)에서는 간흉(奸兇)한 형상과 궤휼(詭譎)의 태도를 수많은 말로 횡설 수설 못하는 소리가 없었는데, 그 말들이 모두 분질(憤疾)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아, 삼사三司란 임금의 귀요 눈이며, 공론公論)이 있는 곳으로 그들이 맡은 바 책임이 얼마나 큰 곳입니까. 그러나 감히 없는 사실을 캐내어 서로 야합하여 남에게 대악(大惡)을 가하려 하고 있다면 그들 소견이 그릇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말한 것 가운데 다투다가 사람을 죽였다느니, 뇌물로 1백 석을 받았다느니 한 것들은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한 것들로서 더욱 용서할 수 없는 문제들인데, 이이에게 과연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면 이는 마땅히 그 죄를 분명히 바로잡아 왕법王法을 보여야 할 것이지 보통으로 보아 불문에 부칠 수는 절대 없는 일입니다. 지금 여항(閭巷)의 사람들이 장로(長老)에게 말할 때도 반드시 공평한 마음과 정직한 얼굴로 조금도 속임없이 사실만을 고함으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시비是非가 어디에 있는가를 분명히 알도록 하여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군신君臣·부자父子의 사이에 어떻게 사실도 없고 근거도 없는 부사(浮辭)를 가지고 애써 시청(視聽)을 현혹시키려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 인심이 불울(拂鬱)하여 여항간에는 논의가 빗발치고 있으며 시론(時論)을 무서워하는 부형(父兄)들이 간혹 자기 자제(子弟)들을 경계시키고 있지만 그러나 사람 본연의 마음은 똑같기 때문에 시비에 대해서 스스로 금하지 못하여 터져 나오는 사례가 흔히 있으며, 심지어 군인軍人·무부武夫들까지도 하늘을 불러 자기들의 억울한 감정을 호소하고 싶어 하고 있으니, 아아, 이른바 삼사三司의 공론 외엔 반드시 또 하나의 다른 공론이 없으리라고 보장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아아, 이이는 이 시대의 도와주는 이들이 적은 혼자의 몸으로 안으로는 정사를 닦고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는 공적을 이루어 보려고 하였으니 그 뜻은 충성스러운 것이었으나 계책이 소략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혼(成渾)으로 말하면, 산림의 은일(隱逸)로서 세속의 영욕을 벗어나 도(道)로써 스스로 즐기는 자입니다. 그에게는 털끝만큼도 외물(外物)을 그리워하는 생각은 없고 일생동안 전정(專精)하게 자신을 지킬 마음만 있어, 안으로 실덕(實德)이 쌓여 명성이 밖에까지 들림으로써 결국 구중(九重)의 윤음(綸音)을 받고 삼빙(三聘)에 의하여 나왔으니 그의 출처(出處)를 보고 세상의 오륭(汚隆)을 점칠 만한 자입니다. 일찍이 이이와는 도의(道義)로 사귀어 천인(天人)의 학문과 의리(義利)의 구별에 관해 서로 강마(講劘) 절차(切磋)하면서 그 뜻을 끝까지 캐고 그 요점을 알아내는 사이로서 비록 동심 동덕(同心同德)이라 하여도 될 것입니다. 지난번 성혼이 성 안에 있을 때 삼사三司가 이이를 논핵하기 위하여 옷소매 속에 탄핵문을 넣고 다니며 날이 갈수록 점점 더하였는데 이때 성혼의 마음에 만약 이이가 그르다고 생각되었다면 비록 서로 두터운 사정(私情)이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감히 거짓으로 소사(疏辭)를 꾸며 발을 끌고 궐정(闕庭)에 들어와 그의 죄악을 덮어줌으로써 전하의 총명(聰明)을 속이겠습니까. 산인(山人)의 마음 씀이 과연 그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한 이치가 없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것입니다. 언자(言者)들이 갑(甲)에게서 화난 것을 을(乙)에게로 옮겨 심지어는 ‘붕비(朋比)를 체결하고 밤낮으로 경영하여 성청(聖聽)을 현혹시킴으로써 사림을 망타(網打)하려 한다.’라고까지 하였으니, 아아, 산인에 대한 대우치고는 너무 박절하지 않습니까. 한(漢)의 고조(高祖)가 선비를 하찮게 보아 만매(慢罵)하였으나 상산(商山)의 사로(四老)에 대하여는 예하(禮下) 하여 그들에게 조호(調護)의 책임을 지우려고까지 하였고, 광무(光武)도 암혈(岩穴)의 선비를 물색 끝에 양구(羊裘) 입은 조수(釣叟)를 만나서는 즉시 와내(臥內)에 들게 하여 그의 배를 어루만져 주었을 만큼 모두 부드럽고 겸허한 예로 임학(林壑)에 묻혀 있는 사람들을 대우하였고 털끝만큼도 경모(輕侮)하는 뜻을 두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만세(萬歲)의 계통을 창업하기도 하였고 중흥(中興)의 공을 이루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원元의 조굉위(趙宏偉) 같은 사람도 예융(裔戎)의 곤수(閫帥)로서 오히려 금화(金華)의 처사(處士) 허겸(許謙)을 초빙하여 자기 낭료(郞僚)들로 하여금 긍식矜式하게 할 줄을 알았고, 명(明)나라 왕진(王振)은 혼매한 조정의 권당(權黨) 이었지만, 감히 당시의 명현(名賢) 설선(薛瑄)을 등용하여 그에 의지하여 유지하려고 하였는데, 이 두 사람은 비록 속마음으로 좋아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오히려 그들 이름을 사모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당당한 이 성명(聖明)의 시대에 이같이 마음을 경악하게 하고 눈을 해괴하게 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성혼을 일러 ‘몸은 산야(山野)에 있으면서 서찰이 도하(都下)에 줄을 잇고, 조정 정령(政令)과 인물 진퇴(進退)에 있어 모르는 것이 없으며, 나오고 물러가는 것 역시 군부(君父)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와 친한 자의 절간(折簡)에 의해서 움직인다.’ 하였는데, 그렇다면 성혼은 특별히 산림(山林) 이라는 이름을 빌어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했으며 공명(功名)을 좋아하고 당원(黨援)을 세우는 그야말로 하나의 더럽고도 무상한 사람인 것이며, 직을 사하고 조용히 물러가 견묘(畎畝)에서 스스로 즐기던 그의 전후의 일들도 오직 하나의 간진(干進)을 위한 지름길을 만들려고 했던 행동에 불과한 것이었으니, 성혼 같은 현자(賢者)로서 그러한 일이 있겠습니까. 신으로서는 의혹스럽습니다. 이렇게 되니 인심들이 더욱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마음을 돌리고 해체(解體) 된 상태로 모두 동해(東海) 물가에나 가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상(領相) 박순(朴淳)에 관하여는 그의 사람됨을 신으로서는 더욱 모릅니다. 다만 그는 청신 아결(淸愼雅潔) 하고 애인하사(愛人下士) 한다고 들었을 뿐인데 그가 과연 이상의 여덟 글자를 그대로 지킨다면 비록 그를 일러 어진 재상이라고 하더라도 안 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지난번 탑전(榻前)에서의 말이 어찌 소견 없이 한 말일 것이며 또 무슨 구무(構誣)·함해(陷害)의 마음이 있어서였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그의 죄목 10가지를 하나하나 세어 극구 저배(詆排)한 것이 윤원형과 이기(李芑)의 간교함과 다름이 없으니, 아아, 성명의 세상에 차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박순·이이·성혼 3인이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붕당을 세우고 세력을 다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더욱 인심을 압복(壓服)시킬 말이 못됩니다. 탄장(彈章) 이 빗발치듯하는데 저들이 어찌 구차히 붙어 있으려 하겠습니까. 오늘은 이이가 가고 내일은 박순이 떠나고, 또 내일은 성혼이 떠나고 하여 2∼3일 사이에 조정의 노성(老成)한 사람은 초야로 떠나고 산인(山人)은 도성을 떠난다면, 서로 이어 떠나는 그들이야 한 수레에 몸을 싣고 사이좋게 가겠지만, 기상은 수참(愁慘)하여 보이는 물건마다 슬픔을 자아낼 것이고, 성상은 고립(孤立)되어 감히 말하는 자가 없을 것이니, 지난날 언관(言官)이 말했던 ‘일망타진으로 나라를 비게 만들 것이다.’라고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어찌 한심할 일이 아닙니까.
대체로 언관이란 말하는 것으로 책무를 삼는 것이어서 언제나 임금을 요(堯·)순(舜)으로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에 허물이 있기 이전에 규찰하게 되고, 또 신하들도 직(稷·) 설(契)같이 만들고자 하여 과실이 있기 이전에 책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에서는 잘못 등용하는 일이 없고 아래서는 실효(實効)를 나타내어야 비로소 함께 치평治平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또 공정한 마음과 곧은 도(道)로써 나라에 몸 바쳐 가정도 잊을 만큼 성실하고 굳굳하여 두 마음을 품지 않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지금의 언관들도 다 그러한 책임이 있고 모두에게 그러한 충성이 있을 것인데 왜 자기 직책에 맞게 우리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우리 재상을 직·설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이에는 혹 한둘 과감한 사람이 없지 않아 말과 행동에 있어 전도(顚倒)와 실중(失中)을 면치 못하고, 때를 씻어가며 하자를 찾으려 하고 허물없는 곳에서 허물을 찾으려고 하는 자가 있을 것인데, 아아, 말을 했을 때 남이 신복(信服)하게 하려면 그렇게 하여서는 안 되리라 생각됩니다.
신은 어리석고 무상한 위인으로,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오래도록 욕되게 하고 있으나, 내가 가진 실행(實行)이 없으니 어떻게 남에게 실행이 있도록 할 것이며, 내가 가진 실학(實學)이 없는 처지에서 어떻게 남에게 실학을 권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어린 왕자를 잘 보양(輔養)하지도 못하였고 의혹을 풀어주지도 못하였습니다. 임해군(臨海君)은 사책(史冊)을 거의 마쳐 가는데도 아직 그 강령(綱領)조차 알게 하지 못하였고, 광해군(光海君)도 《소학(小學)》을 이미 마쳤지만 아직 기본(基本)을 배양하지 못하고 다만 말단적인 강설(講說)만 하였지 실득(實得)의 공부가 있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봉록(俸祿)을 허비하여 태창(太倉)을 축내었으니 신의 죄 하나이며, 그 지위에 있지도 않으면서 분에 넘치게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을 말하여 망령되이 시정의 잘못을 논함으로써 금기(禁忌)에 저촉되어 ‘그 나라에 있으면 그 나라 대신의 그름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크게 어겼으니 신의 죄 둘입니다.
몸에 두 가지 죄를 범하였고 행실에 하나도 장점이 없으니 떠나는 것이 도리입니다만, 아직까지 애써 부끄러운 얼굴을 들고 그대로 앉아 있었던 것은 다만 왕자(王子)를 저버리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입니다. 왕자도 서로 저버리고 싶지 않았는데 하물며 전하를 저버리겠습니까. 위태로운 상황을 목격하자 충담(忠膽)이 저절로 커져서 입을 다물려고 해도 다물 수가 없었고 혀를 가두어 두려고 해도 가두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말이 나가면 화가 따르리라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눈물을 거두고 꿇어앉아서 이 우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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