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공 하경복
두만강 유역의 6진 개척사업과 하경복 장군
개국 초기 1393년태조 2년 이지란을 동북면 안무사로 함길도에 보내 갑산과 경흥 남쪽에 성을 쌓고 여진을 진무鎭撫하면서 처음으로 동북면 지방을 경략하기 시작하였고, 5년 뒤 적극적인 동북면 경략을 위해 정도전이 동북면 도선무순찰사로 파견되면서 비로소 군․현의 지계地界가 정해지고 변방방어진邊方防禦陣인 부府를 설치하여 경원부라 하였다.
태조 때에 잠잠했던 여진족이 태종 시대에 들어서자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태종 6년 여진의 우디거족이 경원의 소다로에 침입하였고, 태종 10년에는 여진의 우량아족과 결탁하여 경원부에 침입하였다. 이후 여진은 각 부족을 연합하여 경원지방을 자주 침입하여 마침내 경원병마사가 크게 패하자 경원의 부府를 경성으로 후퇴시켜 경성을 방어의 요충지로 삼았다. 부府를 후퇴했으나 여진의 소란은 더욱 심하여 1422년世宗 4에는 우디거족 수백 명과 우량아족 수백 명이 경원지역에 수차례 침입하여 경원지역의 폐해도 극심하였다. 마침내 조정의 중신회의에서는 부(府)를 다시 용성으로 후퇴시키자는 의론이 모아졌는데, 이때 양정공 하경복46세 장군과 문신 김종서33세는 강력히 반대하였다. 세종 임금도「조종의 구강舊疆을 촌토寸土라도 내줄 수 없다」는 강력한 결의를 보이면서 그해 12월 지략과 용맹이 뛰어난 하경복 장군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파견하여 대처하게 하였다. 이후 장군은 동북면 방어의 실무자인 함길도 도절제사로 10년간 연임하여 근무하면서 이처럼 긴박하고 중요한 여진족 문제의 어려움을 슬기롭게 극복하여 부府의 후퇴론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었다.
장군이 국경을 지켰던 10년1422년~1432년 동안은 야인들이 장군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하지를 못해 대체로 큰 피해가 없었다. 또한 이 기간 동안에 부하 절제사들의 패전도 없었고 장군 또한 큰 실책이 없어 문책을 당한 일도 없었다. 1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단 한 번의 문책도 없었다는 것은 장군의 뛰어난 능력과 인재 발탁의 귀재인 세종의 특별한 지우知遇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1432년 世宗 14 경원부의 서쪽지방이며 여진 출몰의 요해처가 되었던 석막(부령)을 평정하여 영북진을 설치한 후 장군은 판중추원사로 내직에 들어오고 후임 도절제사로 성달생(성삼문의 祖父)이 파견되었다.
장군이 내직으로 돌아온 다음 해(433년에 여진의 우디거족이 오도리족을 습격하여 그 추장 父子를 살해하는 등 여진 간에 큰 내분이 일어났다. 세종은 이를 구강 회복의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두만강의 천연적인 험준함을 북변의 경계로 삼고자 유능한 장수를 함경도로 파견하고 싶었으나, 10년간 북방근무를 한 장군을 또 다시 추운 북녘 땅에 보낼 수 없어 대신 강경파 문신 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파견하였다. 이듬 해世宗16년부터 북방개척사업을 시작하여 동북지방 경략에 박차를 가하는 동안 장군은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함길도 도체찰사, 함길도 도순검사 등을 자청해 함길도를 오가며 전임 장수로서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관찰사 정흠지와 도절제사 김종서에게 축조를 지시하는 등 여려가지 계책을 의논하였다.김종서는 세종 15년 함길도 관찰사로 파견되어 2년 뒤 함길도 도절제사를 겸하였고, 세종 18년부터 함길도 도절제사 직만 수행 하다가 세종 22년 형조판서로 내직에 들어왔다.
장군은 세종 18년 경상우도 병마절제사로 내려가 세종 20년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 16년 종성군을 설치하면서 시작된 함길도 지역 개척 사업이 장군이 세상을 떠난 11년 뒤 세종 31년 부령부를 설치함으로서 6진경원,종성,회령,경흥,온성,부령 설치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동량북(무산)을 제외한 두만강 유역을 거의 수복하게 되었고 회복된 땅에는 삼남지방의 백성을 이주시켜 개척하는 사민정책을 15세기 말까지 꾸준히 지속하여 두만강 지역을 실질적인 조선의 영토로 경영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