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방재
문화재 :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435호
소재지 :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 오방
오방재梧坊齋는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오방리에 있는 해발 120m의 야산野山에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조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문충공 호정浩亭 휘 륜崙 선생 양위분과 선생의 할아버지 진강부원군 문정공 휘 시원恃源, 할머니 진양 정씨, 선생의 아버지 진양부원군 휘 윤린允潾, 어머니 진양 강씨의 시제時祭를 올린다.
선대先代에서 남긴 중수기重修記에 의하면, 호정浩亭 선생께서 정사定社와 좌명佐命의 공훈功勳이 있어 별세別世하자 왕명으로 오방梧坊에 예장禮葬하고, 공전公田 백결百結을 하사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 사당을 세워 초상肖像을 모시고 후생들이 추모하는 장소로 삼게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삼세三世 뒤에 적사適嗣를 잇지 못하고 임란 뒤 백결의 조세도 모두 없어져 빈터만 남아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었다. 이에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을 지낸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이 외예外裔로서 중건하였으나 전란戰亂에 소실燒失되고, 1670년대 신암 현손 군수공이 선지先志를 이어 띠집으로 중건하였다. 1735년 인재忍齋공 휘 윤관潤寬과 군수郡守공이 기와를 얹어 중수한 것을 1764년에 죽와竹窩공 휘 일호一浩와 군수공 후손 이광태李光泰가 응석사 성대암 재목을 구입하여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재사齋舍를 지었다. 규모가 웅장하고 승도僧徒 30여 명이 있어 음식을 제공하는 것과 제사를 받드는 절차가 위의威儀가 있었으니, 대신大臣의 묘소라고 할 만하였다고 한다. 1799년 정조正祖 유제諭祭 때 여러 고을 관원官員과 유생儒生, 또 구경 온 수백 명을 다 수용하여 옥외 풀밭에 앉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흉년이 들고 전답田畓이 메말라 묘소를 지키던 승도僧徒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니 집이 후손朽損되었다. 1824년에 종원들이 의논하여 진달鎭達, 언철彦哲, 대범大範, 응현膺賢이 공사를 감독하고 정범鼎範, 봉운鳳運이 비용을 조달하고, 진철鎭喆과 경현景賢이 재임齋任으로 도와 1825년 3월 20일에 중수하였으나 형편상 규모는 예전의 절반으로 줄었다. 그 뒤 1922년에 다시 중수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는데, 대종회 회장 순봉舜鳳, 부회장 만구萬九, 상대相大 제씨諸氏의 노력으로 2008년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435호로 지정받아 2010년 7월에 문화재 보수 지원금으로 중수하여 새롭게 단장하였다.
1) 오방재 중수기
국가國家에서 왕조王朝가 바뀌는 시기에는 일에 지극한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생각건대, 우리 방선조旁先祖 호정湖亭선생은 회천(回天)의 공적과 천명天命)을 돕고 사직을 안정시켜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 되셨고 세 조정에서 철권鐵
券을 받으셨다. 선생의 시詩에서 "은혜가 하늘 같다."라고 한 바이다. 별세하자 왕명으로 오방梧坊에 예장禮葬하였고, 백결百結의 공전公田을 하사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 사당을 세워 초상을 모셔서 후생들이 추모하는 장소로 삼았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전화에 모두 화재를 입고 말았으니 애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이 재사齋舍는 곧 묘소에 제사를 올릴 때 재명齊明하는 곳이고, 옛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 공이 창건하였다.
뒤에 화재를 당하여 나의 할아버지 인재부군忍齋府君과 신암공新庵公 후손 군수郡守공이 매우 힘들여 중수重修 하였던 것이 지금 80여 년이 지났다. 비바람에 시달려서 기와와 주춧돌이 갈라지고 집채가 무너져, 시골의 늙은이들도 지나가다가 보고 머뭇거리면서 탄식하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니, 우리 방 후손들은 더욱 중수重修하는 공사를 그만 둘 수 없었다. 당시 변변찮은 나와 이광태李光泰군이 함께 이 재임齋任을 맡고 있었다. 멀고 가까운 종족宗族들이 이 일을 두고서 나에게 말하기를 '일은 크고 힘은 약하니 참으로 모기에게 산을 짊어지게 하는 근심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나 할아버지께서 하셨던 일을 계승해야 한다는 의리에서 헤아려보니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마침내 응석사凝石寺의 한 집채를 사들여 수선을 꾀하니 부근의 촌옹村翁들이 각자 그 아들과 조카들을 거느리고 즐겁게 달려와서 일했다. 광태光泰군의 모든 종족과 장우규張友奎 군은 선생의 외손들로서 또한 성의와 힘을 다하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공사를 끝내었으니 이에 사람의 마음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오호라! 선생의 명성은 어린아이들도 외우고 선생의 공적은 역사에 전해지고 있으니, 이는 백세百世 후에도 선생은 길이 잊히지 않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내가 어찌 감히 함부로 입을 놀리고 사실을 부풀려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데 스스로 빠지겠는가?
낙성落成 하는 날, 모든 분들이 부탁을 하여 대략 위와 같이 전말顚末을 기록하면서, 또한 선생의 공명과 사업으로써 우리 집안의 후손들이 무궁히 발전하기를 바란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두 번째 맞은 갑신甲申 1764년에 방후손傍後孫 일호一浩 삼가 기문記文을 짓다.
梧坊齋重修記
國家受禪之際事有至難惟我傍先祖浩亭先生有回天之功定社佐命爲開國元勳三朝鐵券先生詩所云恩若昊天者也及卒王命禮葬于梧之坊賜百結公田俾奉香火建閣奉眞影以爲後生羹墻之所矣龍蛇之燹沒入灰燼可勝惜哉是齋卽墓祭齊明之室而故議政府參贊新庵李公俊民所刱建也後遭回祿之灾吾王考忍齋府君與新庵公後孫郡守某極力重修于今八十有餘年風雨漂撓瓦石泐棟宇傾頹鄕父老之過而覽者莫不躊躇而咨嗟則凡我傍後裔之感尤有所不能已者也時不佞與李君光泰甫同任是齋遠近宗族以是役見余言之事巨力綿實有蚊山之憂然揆諸堂搆之義有不敢辭遂買得凝石寺
一屋子爲修繕計附近村翁各率其子姪樂爲之赴役光泰君諸族及張君友奎甫以先生外裔亦竭誠盡力未幾月訖工于以見人心之天也嗚乎先生之名兒童誦之先生之功竹帛垂之此足以不朽先生於百世矣不佞何敢妄喙浮實自陷於阿好之歸哉飮落之日因僉員謬託略記顚末如右且以先生之功名事業期望乎吾門後進於無窮云崇禎紀元後重甲申傍後孫一浩謹記
2) 오방재 중수기
오방재梧坊齋는 곧 나의 방선조傍先祖 문충공 호정浩亭선생 묘소의 아래에 있는 제명齊明하는 재실齋室이다. 재사齋舍의 흥폐興廢와 일의 전말顚末은 나의 선고先考 죽와부군竹窩府君의 중수기重修記에서 분명하게 살필 수 있으므로 중복할 필요가 없으나, 어쩔 수 없이 언급하여 뒷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 있다.
오호라! 선생은 크고 높은 덕망과 훌륭하고 큰 업적으로 조선을 개국하고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원훈元勳이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후사後嗣가 없었으니 하늘이 선생에게 어찌 덕을 내리는 데는 후했으나 그 보답은 하지 않았는가?
선부군께서 이 재사를 중수하신 것이 이미 60여 년이 흘러서, 위로는 비가 새고 옆으로는 바람이 들어와 거의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다.
되돌아보면, 변변찮은 나의 나이가 지금 여든이 넘어 아침저녁으로 저승사자를 기다리며 세상일에는 뜻을 두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재사가 영원히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종족宗族 과 이군李君 아무개와 정성과 힘을 다하여 마침내 긍구肯搆의 바람을 이룰 수 있었고, 이에 나의 책임을 대략 채울 수 있게 된 듯하다. 후세들이 우리들의 이런 마음을 잇는 자도, 우리들이 우리 선배들의 마음을 잇는 것과 같은 것이 있을 것이로다. 진실로 이런 마음을 보존하면 우공愚公이 산을 옮기는 것도 어려움 없이 쉽게 이룰 수 있을 것인데, 더구나 이 재사를 수리하는 일쯤이야! 만약 이러한 마음을 보존하지 못한다면 평천장平泉莊의 수석壽石도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니, 더구나 이 재사를 수호하는 일이야 말하여 무엇 하겠는가?
아! 이 재사의 흥폐는 오직 이러한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경詩經』에 " 길이 효도하고 사모하나니, 효도하고 사모함이 본보기가 된다."라고 하였고, "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지라, 밖으로 그대로 드러나네."하였으니, 모든 우리 성姓을 지닌 뒷사람들이 어찌 이것으로 마음을 삼지 않겠는가? 드디어 마음속에서 느낀 바를 이와 같이 지었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세 번째 갑신甲申 1824년 방후손傍後孫 진탁鎭卓이 삼가 짓다.
梧坊齋重修記
梧坊齋則吾傍先祖文忠公浩亭先生墓下齊明之室也齋之興廢事之顚末我先考竹窩府君重修記歷歷可考則不必架床而顧有不得不一言以示後者存焉嗚呼先生之碩德重望 偉烈鉅蹟爲本朝開國定社元勳而不幸無嗣天之於先生何其厚於德而不食其報也先府君重修已至六十餘年而上雨傍風幾至顚覆顧念不肖年今八十有餘朝夕俟符 到無意乎世事而惟惧是齋之永廢乃與諸宗族及李君某極致誠力得遂肯搆之願於是乎不肖之責庶可塞矣後來繼吾輩此心者亦有如吾輩之繼吾先輩之心者乎苟存此心 則愚公之山尙不難易況緝此齋乎不存此心則平泉之石亦不能保況守此齋乎噫此齋興廢惟在乎此心之存不存如何耳可不愼乎可不勉哉詩云永言孝思孝思維則又曰惟其有之是以似之凡吾子姓之來後者 盍以是爲心遂書所感于中者 如右云爾
崇禎紀元後三甲申傍後孫鎭卓謹記
3) 오방재 중수기
오방재梧坊齋는 우리 진강군晉康君,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문충공文忠公 3대의 묘소를 수호하는 곳으로 이 재사를 세운 것은 오래 되었다. 처음에 상서尙書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 공이 외후손으로 그 일을 주관하여 띠로 지붕을 얹었고, 또 뒤에 신암공의 후손 군수공郡守公이 기와로 바꾸어 얹은 것은 영조英祖 을묘乙卯 1735 년의 일이었다. 응석사凝石寺 성대암聖坮菴 재목을 거두어 와서 같은 규모로 지었다. 그 제도가 매우 크고 훌륭하여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었고 희생犧牲과 제기祭器가 매우 화려하고 풍부하여, 시제時祭를 드릴 때에 본손, 방손, 외손들이 멀고 가깝고를 가리지 않고 미리 모여 재명齊明하였으니, 재사가 크고 훌륭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모두 모여 제사를 드릴 수 있었겠는가?
지난 정조正祖 기미己未 1799 년에 특별히 동부승지 조홍진趙弘鎭을 보내어 문충공 유제諭祭를 지내게 하였다. 여러 고을의 군수와 목사들과 사방의 유생들이 예식을 돕고 구경하는 자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으나 풀밭에 앉고 바깥에서 묵어야 하는 걱정이 없었으니, 생각해 보면 옛 어른들이 마련한 재사의 규모가 어찌 성대하지 않았겠는가?
이후에 간혹 흉년이 들면 논밭이 메마르고 줄어들어 묘소를 지키던 승도僧徒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기둥이 썩어서 부러지고 기와가 깨어져 비가 새어서, 비바람과 쥐와 참새가 침노하는 근심을 막을 수 없었으므로, 늘 제사를 올릴 때에 모두 안타깝게 여기고 탄식하였다.
갑신甲申 1824년 초겨울 그믐께에 여러 종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 재사를 버려둘 수 있겠는가? 첫째는 선조를 추모하는 것이고, 둘째는 선조의 뜻을 계승하는 것에 관계되는 것이 얕지 않으므로, 이 재사를 보수하는 것을 미룰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재물이 옛날만 못한데 집의 규모는 저처럼 크고 넓으니, 규모를 작게 만들고 그 비용을 줄여서 상황에 맞게 꾸려나가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각기 약간의 성력誠力을 내놓고, 익년 한봄에 공사를 하기로 하였다. 초사흘에 터를 닦고 열사흘 만에 대들보를 올렸다. 종중宗中의 진달鎭達, 언철彦哲, 대범大範씨와 아우 응현膺賢이 이 공사를 감독하고 정범鼎範씨와 종질 봉운鳳運이 비용을 조달하였다. 나와 진철鎭喆씨는 본래 재임齋任을 맡아서 앞뒤로 도왔다. 3월 20일에 공역을 마쳤다. 방과 마루와 부엌이 짜임새가 있어 어지럽지 않으나, 단지 그 규모가 옛날에 비해서 반으로 줄어들었으니 절약하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고 형편이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어서 보수할 때는 더욱 규모를 넓혀서 옛날의 모습을 되찾는다면 오늘의 허물을 덮을 수 있고 또한 선조의 자애로운 손자라고 할 만하리라.
적이 이 일로 후세인들에게 바라는 것은, 한 번 쇠하고 한 번 성한 것은 운수의 이치이니, 또한 한 때 규모가 작았던 것을 불만스러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한마디 해 두고 싶은 것은, 이 재사의 용도는 본시 넉넉하지 않았으나 요행이 제사에 제철의 제수를 올리는 것 외에 남는 재물이 있으면 거두어들이지 말고, 이자를 놓아서 반드시 흩도록 하라. 옛사람들이 남는 것을 남겨두어 뜻밖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뜻이 잘못된 것은 아니나, 이것이 곧 오늘 옛날의 규모를 깎아서 작게 만들게 된 까닭이다. 앞으로 전례前例를 옳다고 여기지 말고, 남은 재물을 거두어 기록하여 전임자가 맡고 있던 것을 계속 물려준다면, 뒷날 옛날의 규모를 회복하는 도리에 보탬이 될 것이다. 사람이 좋지 않다고 하여 그 사람의 좋은 말까지 버리지 않기를 바라며, 마침내 이 과정을 기록한다.
을유 1825년 단양절에 후손 경현景賢이 삼가 짓다.
梧坊齋重修記
梧坊齋卽我晉康君晉陽府院君晉山府院君文忠公三代墓道守護之所也齋之設蓋古矣始則尙書新庵李公以外裔主其事而覆以茅又後新庵之後郡守公易之以瓦卽英廟乙卯也掇凝石寺之聖坮菴材一倣其制制甚宏偉可容數百人牲殺器皿極侈而豐 每當瞻掃時本旁外裔無有遠近前期齊集蓋不有宏偉亦何以咸萃而致吉蠲哉越在正廟己未特遣同副知申趙弘鎭諭祭于文忠公列郡牧守四方章甫之贊禮觀光者以百千計而未嘗有草坐露宿之患先父老規模設施顧不盛矣乎自是厥後間値歉土田瘠損守冢僧徒皆渙散無存者棟朽而撓瓦破而漏無以備風雨鼠雀之患每當將事咸懷慨歎之心矣 歲甲申之孟冬月將晦諸宗相與謀曰此齋其可廢乎一則追遠一則繼述所繫不淺修葺之不可緩也審矣雖然物力不逮古昔而間架如彼其宏偉曷若小之而省其費以爲隨時處宜之權也耶遂各出若干力以明年仲春哉生明拓基旬有三日抛樑宗黨鎭達彦哲大範氏及卯君膺賢董其役鼎範氏 及從姪鳳運調其用余及鎭喆氏以本齋任司相先後之以三月二十日工役告訖室堂廚庖井井不亂而但其制度視古減半非以儉也勢有所不得焉爾然而繼此而葺之者苟能增之以復其舊則足以蓋今日之愆而亦可謂先祖之慈孫竊以是有望於來後而一衰一盛氣數之常也又何以一時之小爲歉乎哉抑又有一說焉此齋之用度本自不敷而幸而奉祭時需之外苟有餘貲則不爲收拾取息必盡散而後已有非古人存嬴餘備不虞之意 而是乃所以致今日斲小舊制者也自今以往幸無以已
例爲是收錄嬴餘以相傅掌則其於後來復古之道庶有力焉不以人廢言是所望焉遂爲之記
乙酉端陽節後孫景賢謹記
4) 오방재 중수기
재실齋室은 문충공文忠公 묘소 아래에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생각건대, 우리 문충공文忠公은 종묘와 사직을 보전하는 공로가 있었고, 은덕을 백성들에게 입혀서 조정에서 예禮를 갖추어 장례를 치렀으며 부원군府院君 에 봉하고
공전公田에 세금을 면제한 것은 곧 묘도를 수호하는 법도와 세사歲事를 올리는 의식을 마땅히 지극하게 함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세 뒤에 적사適嗣를 잇지 못하고 백결百結의 조세도 모두 없어졌고, 여러 번의 전화戰禍를 입어 영당影堂도 모두 빈터만 남아서 제사를 주관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진주에 옛날 판서 신암新庵 이공李公이 선생의 외 6세손으로서 재사를 세우고 제전祭田을 마련하여 한 해에 한 번 제사를 올렸던 것이 오래되었다. 임진왜란에 재사가 버려지고 제전의 문건을 잃고 분묘를 돌보지 않았던 것이 거의 백 년이나 되었으니 나무꾼과 목동들도 서글퍼하고 길을 가던 나그네도 탄식하게 되었다.
신암공新庵公의 현손玄孫 군수郡守 공이 선대의 뜻을 능히 이어 힘을 다해 중건하였으나, 그 뒤에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재사에 또 불이 났고, 기유己酉년에 군수공의 아들인 태동台洞 이장李丈이 나의 삼종三從 증조부 인재忍齋공 및 두세 분이 뜻을 같이 하여 다시 중건을 하게 되었다. 임란壬亂 전후로 띠를 얹기도 하고 기와를 이기도 하였으며, 재사가 버려지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한 것이 한두 번에 그치지 않았다.
숭정崇禎 기원후 두 번째 갑신甲申 57년 인재공의 손자인 죽와竹窩 공과 이장李丈의 아드님인 광태光泰씨가 서로 함께 일을 추진하였다. 응석사凝石寺 암자를 사들여 그 규모를 확장하였으니, 본채와 아래채, 마루와 다락과 횡각橫閣과 뒷방이 매우 크고 웅장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때때로 와서 글을 읽었는데, 온갖 조치가 매우 온전하고 성대하였다. 승도僧徒 30여 명이 그 안에 가득하여, 온갖 음식을 제공하는 것과 제사를 드리는 모든 절차가 매우 위의가 있었으니 참으로 중대신重大臣의 묘소라고 할 만하였다.
이후 수십 년 사이에 승도들이 떠나고 홀로 집 한 채만 빈 골짜기에 서있게 되었으니 곧 폐치될 지경에 이르렀다. 단지 우석右釋이라는 한 사내만 골짜기에 머물러 살면서 고직庫直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할 뿐이었다. 옛 시절을 회고하면, 참으로 한심하였고 버려진 방과 부서진 창문만 쓸데없이 넓고 컸을 뿐이었다. 그래서 갑신甲申년 가을에, 규모를 작게 만들 것을 의논하였고 종회宗會에서 파별派別로 안배하여 모을 자금을 나누어 각기 맡겼다. 거둔 것을 모두 합치니 300금이 조성되었다.
유사有司는 나와 하대범河大範, 하응현河膺賢이고, 하진철河鎭喆 ․ 하경현河景賢은 본시 재임齋任이었다.
을유乙酉년 정월에, 옛 재사를 허물고 새 재사를 세웠다. 옛 기초에 따르되 고쳐서 구조를 새롭게 하였으므로, 두 개의 큰 방과 중간에 마루 합쳐서 네 칸이다. 실로 각 서원의 강당講堂의 양식을 본받았다는 데 그 뜻이 있다. 그러나 그 규모의 웅장함은 절반에 지나지 않으나 안정감이 있고 견고하니 백여 년은 지탱할 수 있으리라. 알 수는 없지만 백년 뒤에 다시 어떤 사람이 선대의 미덕美德을 계승할 때에는, 이러한 뜻을 어기지 말라. 공역을 마친 뒤에, 뒷날 이 재사에 오르는 자가 참고할 자료가 없게 될까 두려워서 그 전말顚末을 기록함으로써 보고 느끼는 데 대비하고자 할 따름이다.
시詩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선생의 묘소 아래에서 제사 드리고 재계하는 집을,
선배들이 지어서 면밀하게 갖추어 놓았었네.
백결의 공전公田을 내린 은전이 오래되었고,
열 줄의 어제문御製文에 오래도록 감탄했네.
온갖 일을 겪으면서 승도僧徒들은 다 흩어졌고,
묘소를 우러러 보며 어르신들은 마음 아파했었네.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두 모아져 지금 다시 세우나,
이 후생은 어느 날에 다시 이곳을 느긋하게 배회할까?"
숭정崇禎 기원후 세 번째 갑신甲申에서 2년 째 1825년에 하진달河鎭達 짓다.
위의 글은 선고 역헌공櫟軒公이 순조純祖 을유乙酉 1825년에 지었는데, 43년이 지난 정묘丁卯 1867년에 판각하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벽에 걸었다. 불초자 극범極範이가 삼가 글씨를 썼다.
梧坊齋室重修記
齋是文忠公墓下辦祭之所也惟我文忠公功存廟社德被生靈自朝家禮葬而錫以茅土 曠稅公田則墓道守護之節歲事措辦之儀宜無所不用其極而不幸三世之後適嗣無傳 百結之稅亦至蕩失累經兵燹影堂咸墟主祀無人州故判書新庵李公以先生外六世孫建齋置田以行歲一之祭者蓋久矣龍蛇之際齋宮見廢祭田失券墳墓之不修殆將百餘年樵牧傷悲行路咨嗟新庵公玄孫郡守公克紹先志極力重建而其後不幾年齋宮又火歲己酉郡守公之子台洞李丈與我三從曾祖考忍齋公及二三同志更爲重建則亂前亂後或茅或瓦隨廢隨興不止一二次而粤在崇禎紀元後重甲申五十七年忍齋公之孫竹窩公與李丈之子光泰氏相與敦事買得凝石寺庵大其排置堂舍廳樓橫閣後房甚大且宏余在童年時往讀書則凡百措置極爲全盛僧徒三十餘名充牣其中支供凡百及辦祭等節極有威儀眞可謂重大臣墓所矣乃自數十年來僧徒流散而巍然一舍虛立空谷將至廢置之境而但有右釋一漢留在洞壑擧行庫直之名而已則追想舊日誠極寒心廢房頹窓徒然廣大故乃於甲申之秋謀所以改而小之設宗會排派錢分各任都合所收三百金而成造有司不佞與河大範河膺賢也河鎭喆河景賢本齋任也於乙酉正月破舊立新因其舊礎改以新制兩頭房中間廳合四間也實倣各院講舍之樣而有意存焉然其制度之宏壯比百減半而亦磅礴完固可支百餘年未知百年之後復有何人 其能堂構勿替此意畢役之後竊恐後生之登是齋者無從考據故其顚末以備觀感云爾 詩曰先生墓下辦齊堂前輩營爲備且詳百結公田恩典古十行仙綍感歎長經來甲乙僧徒散瞻望松楸父
老傷僉議皆同今復建後生何日更周章崇禎紀元後三甲申二年河鎭達記右先考櫟軒公撰成於純廟
乙酉而粤四十三年丁卯付之剞劂氏揭于壁不肖子極範 謹書
5) 오방재 중수기梧坊齋重修記
오방재梧坊齋는 참으로 위대偉大한 업적業績을 남기신 우리 선조 삼세三世의 묘소
墓所에 제사祭祀를 드리고 재명齊明하는 곳으로 이 재사齋舍의 연원淵源이 오래되었다. 우리 진강부원군晉康府院君께서는 순충적덕純忠積德으로 문정文貞이라는 절혜節惠의 은전恩典을 받으셨고, 진양부원군晉陽府院君의 수의협찬守義協贊한 공적功績은 국사國史에 빛난다.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문충공文忠公 호정浩亭선생은 고명정대高明正大한 학문으로 화국華國의 큰 문장이셨고, 충신중후忠信重厚한 자질資質로 경세經世의 대유大猷셨다. 정사좌명定社佐命의 원훈元勳이 되셨고 삼 조정三 朝廷의 고굉股肱으로 철권鐵卷을 받으셨다. 별세하자 왕명王命으로 이 오방묘역梧坊墓域에 예장禮葬하였고 백결百結의 공전公田을 하사下賜하여 제사를 받들게 하고 사당을 세워 영정影幀을 모셔서 후생들이 갱장羹牆의 장소로 삼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삼세三世뒤에 적사適嗣를 잇지 못하고 화재를 입어 황폐荒廢해졌다. 1580년 즈음에 선생의 외 후손 좌참찬 신암新菴 이준민李俊民공이 오방재를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에 재사齋舍가 훼폐毁廢되었다. 1684년 즈음에 신암新菴의 현손 군수郡守 이해李楷공이 다시 중건하였다. 얼마 뒤 소실되어 1729년에 방손傍孫 인제忍齋공과 군수郡守공의 아들 이만조李滿肇공 등이 주축主軸이 되어 중건하였고 이어 1735년에 군수공의 후손들이 선대의 뜻에 따라 기와를 얹었다.1764년에 방손 죽와竹窩공과 군수공의 손자 이광태李光泰공이 뜻을 모아 중건하였고 1799년에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이곳에서 유제諭祭하였다. 1825년에 진탁鎭卓 진달鎭達 언철彦哲 대범大範 응현應賢 정범鼎範 봉운鳳運 경현景賢 진철鎭喆공과 여러 방손들이 용도에 맞게 재사齋舍의 규모規模를 반으로 줄여서 중건하였고, 1922년에 모든 방손들이 성력誠力을 모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대종회 회장의 중책을 맡아 직무를 수행함에 대종大宗의 사당에 모든 종족宗族이 다모여 선조를 숭앙하고 종족 간 돈목을 도모함이 마땅한 일이니, 우선于先 이 재齋를 보수하는 것이 숙원이라고 생각하여 정부로 하여금 진입로進入路를 확장하도록 하였고, 2008년에 이 재사齋舍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435호로 지정받았다. 이어 문화재보수 국고지원금 5억 8천만 원으로 2010년 7월 보수공사를 시작하였다. 정전正殿은 썩은 연항椽桁을 바꾸고 기와를 갈고 벽면을 손질하니 반듯하고 날렵하다. 동행랑 서행랑을 헐고 신축하니 재숙齋宿하며 제수祭需를 마련하기에 적합適合하다. 층계層階와 석축을 쌓고 보도步道를 까니 행례行禮에 적합하다. 전기와 급수시설을 갖추니 거처하기에 편리하다. 이어서 담장을 마저 두르니 웅장하고 정연整然하여 중대신重大臣의 묘사廟祠라 할 만하다. 그간 송곡松谷의 만구萬九와 상대相大부회장이 실무實務를 맡아 밤낮으로 지획指劃한 공功이다. 아! 선인들의 중수에 못지않으니 후인들이 어찌 이 재사를 길이 수호하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경건敬虔히 제사 올리면서 훈호처창焄蒿悽愴을 체험하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후식하며 선조의 사업을 익히고 효제孝弟와 충신을 실천하지 않겠는가? 이에 사실과 느낀 바를 대략 얽어 이곳에 오르는 자에게 관성觀省의 꺼리로 삼는다.
2010년 12월 일
대종회 회장 하순봉河舜鳳 기記
6) 오방재 상량문
엎드려 생각건대, 묘소를 우러러보면 서리와 이슬에 느껴지는 마음이 치미니, 이런 것은 후손들이라면 같은 마음이리라. 선조의 자취를 쫓아서 재사齋舍를 짓는데 정성을 다하니, 여러분들이 선조의 뜻을 잘 이어나가려는 마음을 속일 수 있겠는가? 신이 돕는 듯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는데, 재사를 완성하게 되었다.
공경히 생각건대, 이곳 오방의 봉역(封域)은 참으로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우리 선조 3세의 유택이다.
문정공文貞公 할아버지께서 '쌓은 덕과 순수한 충정'은, 선왕先王께서 내리신 절혜絶惠의 은전恩典을 넉넉히 입었구나!
진양군晉陽君께서 '조정에 협찬하고 의로움을 지킨 공적'은, 고려의 역사에 실려 있는 표창하고 존숭하는 글에서 빛나구나!
더구나 우리 문충공文忠公 선생께서는 실로 우리나라의 이윤伊尹이었음에랴! 오랑캐 옷을 버리고 중화中華의 관복을 입게 하여 명明나라 사신 서질徐質을 탄복하게 하셨고, 이미 주춧돌을 놓았는데 경복궁의 좌향을 바꾸게 하시어 무학대사無學大師를 대성통곡하게 하셨다. 우리나라가 크게 다스려진 것은 선생의 힘을 입었고, 우리의 도道도 선생 때문에 크게 밝혀졌다. 어수선한 시대에 경륜을 발휘하여 새 나라를 이루고 임금을 세우는 일을 돕고, 술과 음식으로 즐겁게 잔치할 때에도 세상을 바꾸고 임금의 마음을 돌리는 공적이 있었다. "우禹가 구서九敍의 노래로, 고요臯陶가 갱재가(賡載歌로 순舜 임금을 권면했던 것처럼 보좌하였다."라고 기린 것은 태종太宗의 보묵寶墨에 찬란히 빛나고, "이윤伊尹과 여상呂尙에 뒤지지 않네."라고 한 것은 정조正祖의 유문諭文에 간곡히 표현되어 있다. 태묘太廟에서 함께 제사를 받으신 것은 임금과 신하가 일체라는 것을 징험할 수 있고, 선영先塋의 왼쪽에 합사合祀하는 재사를 세운 것은 천추千秋에 길이 추념하기 위해서이다.
즐겁구나! 이 언덕이 어찌 다만 도간陶侃의 우면지牛眠地에 지나지 않으랴. 지나가는 길손이 반드시 경의敬儀를 표하니, 동자董子의 하마릉下馬陵과 거의 같을 것이로다.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 마음을 정결히 하려고 세운 재사가 날아갈듯 하고, 선조의 사업을 익힐 곳이 있게 되었으니 길이 후손들이 번성하도록 도우실 것이다.
상서尙書공이 외 후손外後孫으로서 처음에 초가집을 지었고, 군수郡守공이 선대의 뜻을 따라 다시 기와를 얹었다. 이곳에서 놀고 이곳에서 쉬면서 효제충신孝弟忠信을 반드시 실천할 만하지 않겠는가? 이곳에서 여름 제사를 올리고 이곳에서 겨울 제사를 올리면서 향을 사르며 추념하면 신령神靈이 강림降臨하는 것을 느끼지 않겠는가?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도 쉬 놀라기 마련인데, 마룻대와 처마는 걱정이 없다고 장담하겠는가? 위와 옆으로 비바람이 치는 것을 유생儒生들도 탄식하는데, 지붕과 담장을 멋대로 짐승들이 이빨로 갉고 뿔로 허무는 것을 보고서 어찌 후손들이 추모하는 마음을 어찌 억누를 수 있었겠는가? 선배들이 재사를 세우는데 얼마나 들었었는지, 응당 오늘 의논하게 되었다. 거북점과 시초점蓍草占을 치니 점괘도 좋다고 하여, 성력誠力을 모으니 금방 불어났고 정성定星도 바야흐로 하늘 가운데 이르렀다. 그동안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마침내 크고도 높으며 잘 갖추어진 재사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영령英靈이 강림하시어 어렴풋이 계시는 것처럼 엄숙하게 흠향하실 수 있게 되었고, 다시 백 겹의 노비가 있어도 무더기로 집안에 들 수 있고, 한 줄기 시내가 옥을 울리듯 졸졸 흘러서 뜰을 돌아 흐르는 소리도 즐겁게 듣게 되었다.
선인들이 중수重修한 것에 가히 모자랄 게 없으니, 길이 뒷사람들에게 칭송받게 될 것이로다.
일하던 연장을 잠시 놓고 노래를 이어서 불러 보세.
어기어차! 들보를 동쪽으로 들어 올리니,
큰 고래가 물을 뿜는 동해가 한껏 보이네.
어째야 그 시절을 만회할 사람을 얻어서,
푸른 하늘에 떠오르는 밝은 해를 다시 맞이할까?
어기어차! 들보를 서쪽으로 들어 올리니,
도를 어지럽히는 허튼 말은 늘 서쪽에서 오네.
아직 남기신 글에 진결眞訣이 있으니,
유학儒學을 일으킨 큰 뜻은 하늘처럼 높구나!
어기어차! 들보를 남쪽으로 들어 올리니,
뽕나무 무성한 고향은 비봉산 남쪽에 있네.
철권단서鐵券丹書는 어디에 있는지 물어볼까?
벽오당碧梧堂은 오래되어도 큰 강은 푸르구나!
어기어차! 들보를 북으로 들어 올리니,
긴 밤 슬픈 바람은 곧장 북쪽에서 불어오네.
사직社稷을 안정시킨 공훈 오백년에 우뚝한데,
무덤이 한 번 닫히면 뉜들 일어날 수 있으랴!
어기어차! 들보 위쪽을 들어 올리니,
푸르고 푸른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시며,
새벽 없는 밤이 기나길다고 마십시오.
천도天都에서도 첫 닭 울기를 기다린답니다.
어기어차! 들보 아래쪽을 들어내리니,
굽이굽이 샘물 흐르는 소리 베개 맡에 울리네.
여기에서 높은 곳을 착안하기 가장 좋은데,
냇물은 밤낮 쉬지 않고 흘러가는구나!
엎드려 바라건대, 상량上梁한 뒤에 기둥과 서까래가 오래도록 안전하고 제주祭酒와 제수祭需가 더욱 정결하기를. 선조들께서 멀고 가까움의 차등이 없이 보시던 뜻을 체득하고 이곳에 와서 화목함을 닦으며, 자제들에게 지혜와 능력을 기르는 공부가 있게 하고 착실히 충효忠孝를 본받게 하시기를. 임술壬戌 1922
하영태河泳台
梧坊齋上梁文 河 泳 台
伏以 瞻斧封而興霜露之感, 繫是後裔同情。遵先武而殫堂構之誠, 可誣諸公善述。若神之助, 不日而成。恭惟 梧坊一區之封, 寔我烈祖三世之宅。文貞祖積德純忠, 優哉先朝節惠之典。晉陽君協贊守義, 煥乎前乘表崇之章。況我文忠先生,
實維邦國衡保。用華制於胡服, 興天使之喟歎。改闕向於旣礎, 發國師之大哭。左海賴之於變, 吾道因以大明。草昧經綸, 佐化家爲國之業。酒食宴樂, 有旋乾回日之功。贊禹陶之敍賡, 獻陵之雲章爛煥。曰伊呂之伯仲, 正考之侑文丁寧。配食太廟之中, 可驗君臣之一體。 祔築先壠之左, 永慕羹墻於千秋。樂哉斯邱, 奚但陶氏牛眠之地。過者必式, 殆同董子下馬之陵。奉先致齊, 爰立丙舍之翼翼。肄業有所, 永庇子姓之來來。尙書以外裔而始茅, 州守追先謨而重瓦。遊於是息於是, 孝弟忠信之必可行。禴於斯烝於斯, 焄蒿悽愴之所由著。星霜易驚滋久, 棟宇安保無虞。致風雨於上旁, 猶爲衿紳之齎慨。任屋墉於牙角, 那禁雲仍之追思。幾費前輩之經營, 宜有今日之謀度。龜筮從而卜云其吉, 鳩僝功而定之方中。曾日月之幾何, 聿睹奐矣輪矣。庶英靈之如格, 可致僾然肅然。遂有百疊蒼鬟, 磊落而入戶。喜聽一道鳴玉, 汨㶁而循除。可無替於前修, 永有辭於來後。郢斤乍輟, 巴唱繼成。兒郞偉抛梁東, 厭見長鯨噴海東。安得當年挽回手, 復迎晴日奠蒼空。兒郞偉抛梁西, 亂道莠言每自西。尙有遺篇眞訣在, 扶陽大義與天齊。兒郞偉抛梁南, 桑柘舊村飛鳳南。鐵券丹書何處問, 碧梧堂古大江藍。兒郞偉抛梁北, 永夜悲風來直北。定社巍勛五百年, 九原一閉誰能作。兒郞偉抛梁上, 玉宇靑蒼臨在上。休道漫漫夜無晨, 天都且待一鷄唱。兒郞偉抛梁下, 曲曲泉鳴響枕下。箇裏最宜着眼高, 波流日夜不曾舍。 伏願, 上梁之後, 楹桷長安, 樽俎益潔。體祖宗視無親疏之意, 修悅睦於來玆。因子弟固有知能之良課, 忠孝於式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