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지미 마을
-사천시 정동면 건지미(乾之尾)
사천시 정동면은 사천강(泗水)을 따라 강 양쪽에 자연마을이 위치하고 면의 중심 되는 곳 남쪽에 이구산이 자리해있다. 옛 부터 이 지역은 산수가 공‧맹(孔孟)의 탄생지인 성역을 닮았다하여 사수(泗水-사천의 옛지명)와 이구산(尼丘山)을 따 부르게 되어 동방의 명지(名地)로 일컬어져왔다. 사천강을 끼고 고성 쪽으로 뻗은 33번 4차선 도로를 따라 정동면사무소를 지나 청널목에서 좌측으로 급하게 꺾어 돌아 1000여 미터를 가면 좌측에 양정공파 사천문중의 세거지 건지미(乾之尾) 마을이 있다. 건지미를 줄여서 건점(乾占)으로도 불리어지고 있는데, 장반갓과 큰골산이 마을의 서북쪽을 병풍처럼 감싸있고 마을 앞을 흐르는 사천강의 건너편에 이구산(尼丘山)이 맞닿아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정취가 느껴지는 마을로 명문 양반가의 세거지로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지명총람』등에서 건지미라는 마을 명칭은, 보(洑)의 물길을 쉽게 이을 수 없어 논농사가 어려운 ‘메마른 땅의 끝’ 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거나, 건지(乾地-양지 바른 곳)에 마을을 의미하는 미(터)가 붙어 지명으로 사용되는 곳이 많다고 하였는데, 선대(先代)의 이거(移居)시기인 17세기 후반의 상황을 고려하면 마을명의 유래는 전자에 더 가까울듯하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된 후 양정공파의 주된 세거지였던 옥종면 월횡마을 부근의 정개산이 새로운 산성으로 지정되면서 영무성 하응도가 별장으로 선임되자 양정공의 5대손인 참봉공(諱,玄齡)도 지역의 장정들을 이끌고 의병으로 참전하였다. 진주목사 나정언이 정개산성으로 피신해오자 왜적은 8천여명의 병력으로 공격하였고 마침내 성(城)이 함락되면서 이후부터 정개산성 너머 골을 억망골(億亡谷)이라 부를만큼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게되어 양정공의 후손들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민들이 희생되었으니 이후로 월횡에서 양정가의 문세(門勢)는 아주 약화되었다. 왜란 당시 4세였던 찰방공(諱,遵海)이 광해 4년 문과에 급제하여 금정도(金井道 )찰방을 지냈으나 인목대비가 유폐되자 인끈(紱)을 던지고 향리 월횡으로 돌아와 월봉산 아래에 임월재를 세우고 자질(子姪)을 훈적(訓迪)하며 경적(經籍)으로 스스로 즐기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찰방공의 장자 처사공(諱,楯)이 전란후의 어려운 시대를 살면서 가세를 일으키고 수행의 도를 닦아 통덕랑(정5품)의 품계를 받았으며 5형제를 두었는데, 5형제가 월횡문중을 재건하면서 양정가(襄靖家)의 구심점이 되었다. 5형제의 막내이신 사천공(諱,大熙)께서 혼인을 계기로 처가와 가까운 사천 동면 이구산 아래 장천(獐川,魯川)으로 이거하여 터를 잡았으니 후손들이 사천문중을 이루면서 공을 존숭하여 입사천(入泗川) 할아버지라고 칭하였다. 사천공의 장인 박유장(朴有章)은 밀양인으로 고성(상리부근)에 거주하였고 현종13(1672)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공감봉사(繕工監奉事)를 지냈으며 장천 일대에 선대로부터 전해온 농토가 잇었다고 전한다. 사천공이 세 아드님을 두셨는데, 첫째 종일(宗一)공은 장천(魯川)에서 대를 이었으며 그 후손들이 노천‧초전‧서포문중을 이루고 있으며, 셋째 주일(周一)공은 사남 죽천으로 이거하여 후손들이 죽천문중을 이루고 있다.
사천공의 둘째 아드님 중추공(諱,元一)이 증.참판(贈參判) 김하현(金夏鉉)의 따님 광주김씨에게 장가들어 오복의 첫째인 장수(長壽)를 누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중추부사에 올랐는데, 중년에 강건너 건지미로 이거한 후 마을앞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으로 전환시켰으니 곧 후손들의 세장지가 되어 건지미는 사천문중의 구심점이 되어 ‘하씨 양반동네’로 예칭 될 수 있었다. 중추공의 장손 처사공(諱,龍寬)의 계배(繼配) 분성김씨는 정조 16년 부군의 상을 당하자 따라서 순절(殉節)하였으므로 순조 16년 암행어사 이화(李墷)의 주청으로 정려가 내려져 당시의 마을 입구였던 청널목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고 순조실록(16년7월2일)에 실려있다. 중추공의 현손 노천공(魯川公, 諱,進圖)은 학문이 뛰어나 퇴계의 주리설을 정통학맥으로 잇는 안동을 참된 마음으로 수차례 왕래하여 정재 유치명의 문하를 출입하였고 선대에서 계속 저술해온 문적을 잘 정리하여 후대로 전하게 하였다. 중추공의 6세손 초산공(諱,斌憲)도 학문이 뛰어나 사천 향교 전교(典校)를 지내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앞장섰으니 사천지(泗川誌)에 “득문위기(得聞爲己)하여 불구성예(不求聲譽)하고 둔세불원(遯世不怨)하였다.”고 기록 되어있다.
건지미는 산업화 이전까지 하씨 씨족마을로 이어졌으나 선족숙(先族叔)들의 남다른 교육열로 후손들 대부분이 고향을 떠나게 되어 현재 남아있는 집은 몇 되지 않지만 사천문중의 문장(門丈) 30세(世) 만홍(萬洪) 어른이 세장지를 지키고 있다. 정려비가 있는 청널목에 문장의 주도로 세워진 사하재(泗河齋)에서 매년 음력 10월 18일 사천공(입사천 할아버지)이하 선조의 세제(歲祭)를 받들고 있다. 글 하봉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