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재기景醒齋記
진양 대각에 있는 경성재는 환성재 하선생을 경모하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대저 일언으로 옳고 그름을 가려 밝히고, 일신으로 성쇠의 운수에 유관한 이는 그 삶이 세도의 경중이 되고 그 끼친 교화가 퇴폐해지고 나약해진 풍속을 진작시키기 때문에 후인의 경모함이 오래 되어도 그치지 않는데, 공 같은 이가 그런 사람이 아니겠는가!
예전 조선조 선조 때에 붕당이 발생하여 조정이 분열되었는데, 그 처음에는 한두 선비의 사사로움으로 말미암아 갈라졌지만 마침내 돌고 돌아 격렬해져 서로를 비난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모함하여 각각 붕당을 만들었다. 이에 문득 소인의 악행이 드러나고 흉악한 무리가 날뛰어 군자의 도가 소멸하니 그 재앙이 지극하였다.
공은 일찍이 유일遺逸로 왕자사부가 되었고 성 우계 이 율곡 두 선생과 도의교를 맺고 청의淸議를 주장하였으니 선량한 사람들이 추중하였다. 두 선생이 뭇 사람의 모함을 받아 화를 장차 예측할 수 없게 되자 수천마디의 소를 올려 통렬히 논박하고 성청의 깨침을 바랐다. 이로써 반대의 사람들이 떼 지어 일어나 공격하니 일신이 화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지만 회피하지 않았다. 옛날 성인이 역易을 지으면서 양을 북돋우고 음을 억제함에 힘쓴 것은 선악의 분별이 이에 있다고 여겨 공허한 문자에 부친 것이지만 어찌 세도를 깊이 염려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비록 낮은 지위에 머물러 당세에 행한 일이 없지만 그 소를 힘입어 청의가 부지扶持되고 간사한 자가 자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그 학문의 바름과 식견의 고매함은 성인의 양을 북돋우고 음을 억제한 뜻을 깊이 체득하였음을 볼 수 있으니 세도에 끼친 공로를 어찌 공허한 문자라 하여 낮게 보겠는가! 공은 일찍이 진양에서 상주로 잠시 옮겨가 살다가 임진란을 당하여 의를 세워 적에게 항거하다 마침내 부자가 순사하여 일문이 충효로써 조정의 포상을 입었다. 그 수립한 업적은 또한 참으로 지조를 실행한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돌아보건대 후사가 세 번이나 끊어져 자손이 몰락하고 화재를 여러 번 겪어 유적이 소멸했으며 표창의 특전을 조정에서 받지 못하고 제사의 의식을 고을에서 행하지 못한 지 수백 년이니 아름다운 명성이 점점 사라졌다. 진실로 그 자취가 드러나고 감추어지는 운수는 알 수 없지만 상론하는 이들이 개탄한 지 오래 되었기에 재사의 건립이 비록 늦었지만 또한 그만 둘 수 없다. 이 역사는 비록 자손들의 정성에 의한 것이지만 경모하는 마음은 많은 선비가 한결같으니 이로 인하여 그 풍운을 더욱 구하면 장차 훗날 존숭하는 자리에서 무궁토록 감응할 것이다.
주손 재문載文이 그 족인 차운溠運과 함께 찾아와 나의 글을 청했다. 내 일찍이 공의 일에 느낀 점이 있고 또 말세의 사견이 범람하여 공의가 사라짐을 탄식하기 때문에 그 업적을 논하여 이 재사에 오르는 이에게 보인다.
을묘년 11월 화산 권용현 기
景醒齋記
晋陽之大覺有曰景醒齋者爲景慕喚醒齋先生河公而築者也夫以一言而明邪正之辨以一身而關消長之運者其生也爲世道輕重而其遺風足以激勵頹懦後人之景慕自有愈久而不己者若公豈非其人耶當穆陵之世黨議興而朝箸潰裂其始蓋由三士流私自歧貳而轉成乖激終至於互相朋比構陷善類各樹其黨則便成匪人之否而贏豕蹢躅爲君子道消之時便成其禍極矣公嘗以遺逸爲王子師傅與李栗谷成牛溪二先生託以道義主張淸議爲善類倚重及二先生爲群小構誣禍將不測則抗疏數千抗疏言極論痛辨冀悟上聽雖以是被一邊人之群起攻之身不見容而無所避也昔聖人之作易易眷眷於扶陽拂隱之義者豈不以淑慝之分在是而雖寓之空言其爲世道慮深矣公雖低徊下位無所施爲於世然賴其一疏而淸議有所扶陰邪者不得售則其學問之正識見之高深有得於聖人扶㧕之義而其有功於世道者豈以空言而少之耶公嘗自晋陽移寓商山當島夷之亂仗義拒賊竟至父子同殉以一家忠孝爲朝家所褒則其所樹立又可謂允蹈所守也豈不偉哉惟其子性零替鬱攸累灾遺蹟蕩佚節惠之典未得於朝祭社之禮未擧於鄕至今數百年敢徽沉泯則顯晦之數誠有不可知而尙論者之致慨久矣是齋之築雖晩而亦有不可以己也此雖由於子孫之誠而景慕之音固多士攸同則必有因此而益溯求其風韻將爲異日崇事之地而興感於無窮者矣其遠冑載文與其族溠運來徵記余竊嘗有感於公之事而又難末世之偏私勝而公議易泯故備論其蹟以示於登是齋者
乙卯1975之歲陽復月 花山 權龍鉉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