覺齋公 河沆 墓碣銘
선조 23년 경인 십이월 십구일 각재선생覺齋先生이 내복당來復堂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오십 삼세였다. 다음해 신묘辛卯년 대각 산중에 장사葬事하였다가 후일 수곡 월아동 간좌원艮坐原으로 이장移葬하였지만 지금까지 삼백년이 되도록 묘소에는 비석이 없었다. 대개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삼년 만에 임진년이 일어나 영남이 가장 먼저 적賊에게 짓밟혔기에 선생의 저술著述과 문적門籍이 모두 분실되어 전해지지 아니하고 또 당시 문하의 제현중諸賢中 우리 선자先子 송정선생松亭先生과 사호思湖 오공吳公이 친히 수업함이 제일 오래되었으나 언행을 기술하지 않아 후세에 징험할 것이 없었다. 이에 후인들이 비록 흩어진 것을 수습하여 그 유집遺集을 간행하고 행장을 지었으나, 그러나 이를 근거하여 안본按本으로 삼는다면 소략할까 의심스럽고 추론推論하여 이야기를 만든다면 참람할까 두려우니, 이것이 지금까지 묘소에 비석이 없었던 까닭이다. 선생의 주손冑孫 수진壽鎭이 나를 방문하여 말하기를 일이란 참으로 후일을 기다려 완비되는 것도 있지만 선생의 실덕實德과 가언嘉言은 세월이 오래될수록 더욱 그 전함이 상실되고, 또 지금은 세도가 점점 혼란해져 다시 더 기다릴 것이 없다. 청컨대 일언을 베풀어 묘전에 새겨 학자들로 하여금 상고할 바가 있게 하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니 선생의 휘는 항沆이요, 자字는 호원灝源이며 하씨이다. 본관은 진양의 대족으로 고려 절신節臣 증평장사贈平章事 휘諱 공진拱辰 이후 대대로 명사名士가 이어졌다. 황고皇考 휘 인서麟瑞는 호號가 풍월헌豊月軒이니 생원 진사 시生員進士試에 아울러 합격하였고 남명선생과 벗으로 친했다. 대부 휘 형大父 諱 瀅은 현감縣監이요, 육세조 휘諱 유游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이다. 풍월헌공豊月軒公은 이자二子를 두었는데 장자長子 낙洛은 유일로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고 선생은 그 차자次子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며 선공先公의 명으로 상주 김후계金後溪 범範에게 처음 수학하였다. 남명선생이 덕산에 들어오자 드디어 제자의 예를 갖추고 스승으로 섬기며 소학 근사록 성리서小學 近思錄 性理書를 배웠으니 조선생曹先生이 나의 벗이라 칭하면서 “내 인재를 얻어 가르친다.” 고 말하였다. 당시 최수우崔守愚, 오덕계吳德溪, 정한강鄭寒岡, 김동강金東岡 제현이 모두 문하에 있었으니 선생이 날마다 이로 더불어 강마하여 학문이 크게 진보하였다. 때때로 조선생을 좇아 천령天嶺에서 강개암姜介菴을 방문하고 안음安陰에서 임갈천林葛川의 첨모당瞻慕堂을 방문하면서 삼동三洞의 수석水石 경치를 두루 구경하였다. 정묘년 사마시에 장원하였으며 신미년 부모상을 연이어 당했으니 상喪을 치름에 예제를 다했다. 임신년 조선생이 편찮다는 말을 듣고 선생은 시묘중侍墓中이었으나 달려가 문안하였으며 세상을 떠나자 유명遺命을 받들어 상喪을 다스림에 한결같이 사상례士喪禮를 따랐다. 병자년 수우당守愚堂과 더불어 덕천서원을 건립하여 조선생曺先生을 향사하였다. 을해년 중 관료 중에 동서당東西黨이 생겨 조정이 어지럽고 사습士習이 갈라지자 선생은 이를 매우 싫어하여 특립特立하여 당의黨議에 관여하지 않았다. 침랑寢郞으로 재차 불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임천林泉에 자취를 숨겨 경서를 즐기며 전혀 세상에 뜻이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임금과 나라를 근심하고 시대와 풍속을 상심하는 뜻이 왕왕 음영吟詠에 나타났으며, 또 일찍이 수 만어의 소疏를 초하여 시정時政을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그 무익함을 짐작하고 그만두었다. 선생은 천품이 특출하며 대도大道를 일찍 듣고 덕행이 숙정하였다. 그 기상의 청명은 곧 남명이 「설중의 한매寒梅」라 하였고, 기량器量의 정대正大함은 덕계德溪가 처사處事에 온건하다 하였으며, 그 절조節操의 확고한 지침은 한강寒岡이 말하기를 각재覺齋도 역시 그러하다 하였다. 학문에 이르러선 더욱 공력功力을 발휘하였고 글씨에 조예 깊어 날아갈 듯 생기가 있었으니, 명明나라 사신이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