守肯齋公 河天一 墓碣銘
守肯齋公 河天一 墓碣銘
 부군府君의 휘는 천일天一이요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긍재守肯齋 또는 도계 거사陶溪居士로 송정선생의 중제이다. 우리 진양 하씨는 대대로 덕망 높은 가문으로 진주 수곡 세성산은 하씨의 세장지이다. 부군의 묘는 세성산 뒤 임향壬向의 언덕에 있다. 선계는 송정 선생의 묘갈에 잘 드러나 있다. 부군의 형제는 종숙부인 각재 선생을 사사師事하여 남명 선생의 지결旨訣을 듣고 이름난 유학자가 되었으니 묘갈을 새겨 후대인들에게 보일 만한데, 지금까지 없었던 것은 알맞은 때를 기다린 것이었다. 대개 후손들이 쇠미하여 힘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생각건대 부군의 행실의 실상이 오랜 뒤에 혹 상고할 만한 것이 있을까 기다렸던 것이다. 이것 때문에 묘갈을 세울 겨를이 없었던 것인데, 그 뒤 세월이 오래되어 더욱 고증할 것이 없게 되었다. 아, 마침내 다시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11대손 정진禎鎭이 울면서 나에게 말하기를 “다행히 묘석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그대가 명을 써 주십시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슬프게 여겨 감히 사양할 수가 없었다.
 부군은 1558년 가정 무오년에 태어나 22세에 생원시에 합격을 하고 유일遺逸로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1601년 만력 신축년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안릉安陵 이씨李氏 모某의 따님이며, 두 아들을 두었는데, 직장直長 경瓊과 선교랑宣敎郞 장璋이다. 큰아들은 후사가 없고 다만 외동딸이 창녕 성씨인 성황成鎤에게 시집갔다. 둘째 아들은 네 아들을 두었으니 선교랑宣敎郞 자한自漢, 주부主簿 자황自潢, 자회自淮, 자영自瀛이다.
 부군이 세상을 떠난 후 송정선생이 그 문고를 편집하여 서문을 붙였는데 지금 전하지 않고 있다. 『송정세과松亭歲課』중 시문들이 여기저기 보이나 겨우 약간편이다. 「칠팔구육설七八九六說」은 주자 계몽의 의미를 깊이 발명한 것이다. 아, 이 역시 부군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일 것이다. 명에 이르기를,   가학의 연원과 산림의 숨은 덕망을  후예들도 징험할 수 있으니 명을 지어도 부끄럽지 않네.
                                          종후손從後孫 겸진謙鎭 삼가 짓다
墓碣銘
府君諱天一字太初號守肯齋又號陶溪居士松亭先生仲弟也吾河出晉陽世有名德晉州水谷世星山河之世葬也府君之墓在世星山後麓負壬之原先系俱著松亭先生碣府君兄弟俱師事從祖叔父覺齋先生得山海旨訣爲名儒墓道宜有顯刻以示來世而闕焉至今者以有待也蓋因後嗣衰微無以爲力焉且意府君實行之久後或有可採考者是以未遑也其後愈久遠而愈無考焉鳴乎其竟無復有待矣十一代孫禎鎭泣告余曰幸石己具矣子可以銘余悲其言不敢辭府君生嘉靖戊午年二十二中生員以遺逸薦授察訪卒萬曆辛丑配安陵李氏某女二子瓊直長璋宣敎郞長房無嗣只有一女適昌寧成鎤次房四男自漢宣敎郞自潢主簿自淮自瀛府君沒後松亭先生次輯其文稿而序之稿今不傳詩文之散見於先生歲課中者僅若干篇而其七八九六設深有發於朱子啓蒙鳴乎是亦足以見府君矣銘曰
家學淵源山林隱德來後有徵銘庶不怍
                                                         從後孫謙鎭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