參議公 河敬履 壇享碑文
參議公 河敬履 壇享碑文
 공公의 휘諱는 경리敬履이고 성姓은 진양하씨晉陽河氏이다. 시조始祖 휘諱 공진拱辰이 고려 현종 때 거란에 볼모가 되어 고려인으로서 충의忠義를 지켜 죽음을 당했다. 왕王이 그의 충절忠節을 높여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로 추증追贈했다. 수세數世를 전하여 휘諱 탁회卓回가 사문박사四門博士였고 이로부터 오대五代가 연하여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다. 증조曾祖는 증 자헌병판贈資憲兵判 휘諱 거원巨源이고, 조祖는 증 가선병참贈嘉善兵參 휘諱 을부乙桴이다. 고 휘考諱는 승해承海로 증 정헌병판贈正憲兵判이요, 비妣는 보성 선씨寶城宣氏이며, 좌명공신 문충공 호정佐命功臣 文忠公 浩亭 휘諱 륜崙이 종조숙부從祖叔父이다. 공公은 진주 서면 이하리 지금의 진주시 수곡면 사곡리에서 탄생하였다. 소년 시절부터 총민聰敏했고 학문에 독실篤實했다. 형 양정공兄襄靖公 휘諱 경복敬復이 세종조世宗朝 명신名臣으로서 십 오년간 북방수어北方守禦의 중임重任을 맡아오다가 경직京職으로 들어와서는 찬성직贊成職에 올라 국방에 관한 일을 전담하였다. 이와 같이 국사에 분주하여 노모를 봉양하지 못함을 크게 한탄하였다. 세종대왕은 양정공의 이와 같은 충정을 살피시고 아우인 공公을 수령직守令職으로  진주 주의 구읍九邑의 은전을 내려 형공兄公을 대신해 모부인母夫人을 지성至誠으로 봉양토록 했다. 공의 관직생활官職生活은 이리하여 시작始作되었으며, 그 후 평안도 경력平安道經歷과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해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증직贈職되었다. 배配는 진주 강씨이다. 공은 일남 육녀一男六女를 두었는데 아들 충漴은 문과에 올라 지평持平을 지냈고, 장녀長女는 사직司直 유봉柳菶에게 출가하여 삼남 일녀를 두었고, 이녀二女는 증 참판贈參判 이개지李介智에게 출가해 사남 사녀四男四女를 두었으며, 삼녀三女는 김치성金致城에게 출가 해 일녀一女를 두었고, 사녀四女는 허원질許元質에게 출가했으며, 오녀五女는 안창공安昌恭에게 출가해 일남 이녀를 두었고, 육녀六女는 손수령孫壽齡에게 출가해 팔남일녀八男一女를 두었다. 충漴은 백달伯達 숙달叔達 계달季達의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장녀長女는 이맹명李孟明에게 출가했고 이녀는 교리校理 성안중成安重에게 출가했는데 부사 여신浮査汝信이 그 증손이다. 백달伯達은 두 딸을 두어 장녀는 이창윤李昌胤에게, 이녀二女는 조수만趙壽萬에게 출가했으며 대소헌大笑軒 종도宗道는 그의 증손曾孫이다. 숙달叔達은 네딸을 두었고 계달季達은 오남五男을 낳았는데 준濬, 홍洪, 심深, 징澄, 합洽이다.
 거듭된 병화兵火로 가문의 문적文籍이 씻은 듯이 없어져 버렸으니 공公의 행적에 관한 문자文字는 세종실록 여지승람 주지州誌및 보첩에 간략하게 기록된 것뿐이다. 그러나 실록에 기록된 사사모견미전謝賜母絹米箋 및 사위모특가상전謝慰母特加賞箋 두 편篇의 유문을 보면, ‘국가를 위한 노고는 신자臣子의 분의分義에 당연 한 바이온데 도리어 상사賞賜하셨으니 오직 감격感激할 따름입니다’. 하였다. 이 유문遺文만으로도 공公의 평생심행平生心行을 알기에 족한데 어찌 반드시 많은 문헌이 있어야 하겠는가. 양정공실기襄靖公實記에 부기附記된 참의공 사략 끝에 “공公이 수령守令을 지내면서 가는 곳마다 성적聲績이 있었다 했음은 곧 위로 왕을 속이지 않았고. 아래로 백성을 병病들게 하지 않았음을 볼 수 있음이라 했고 국사國事에 분망奔忙했으나 스스로 수고手苦롭게 여기지 아니했음은 북산北山의 대부大夫보다 어질었고 만일萬一 장수將帥가 되었으면 장성長城같이 믿을 만했을 것이며 재상宰相이 되었으면 주석柱石같이 의지할 만했을 것이다.” 라고 했다. 이는 능히 선대 절의先代節義를 이을 만한 것이었다고 했으니, 그 충성과 절의가 어찌 형공兄公에게 미치지 못했겠는가. 다만 모부인 봉양을 위한 효성으로 공公의 관직도 이에 이르러 그쳤으니 그 명수命數가 애석哀惜하기 이를 데 없다.
 신후身後의 일은 더구나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대개 공公의 제사祭祀를 외손들이 받들다가 조역兆域마저 실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랜 세월 동안 세사歲事마저 궐闕했으니 이 어찌 잔손들의 통한痛恨이 아니리오. 이번에 양정공 묘역을 정화淨化함을 계기로 제족諸族이 협의하고 양정공의 천좌阡左에 설단수비設壇竪碑하여 후손에게 공公의 사적을 만분의 일이라도 알게 하는 한편 조선祖先의 위덕偉德을 추모하는 곳으로 하였다. 이로 인해 후손들이 선조先祖를 더욱 숭봉崇奉하고 종족宗族끼리 돈목敦睦한다면 그 높은 덕德이 길이 빛날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으리오.
                    서기 1965년 乙丑 重陽節 법학박사 진양 姜周鎭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