竹軒公 河惺 事蹟碑文
진양을 본관으로 하여 진주에 세거해온 하씨河氏는 국중國中 명벌名閥이 되었다. 고려 충절신忠節臣 증 문하시랑동평장사贈門下侍郞同平章事 휘諱 공진拱辰이 시조始祖)다. 이 문중에서는 대대로 명공석덕名公碩德이 끊임없이 배출되었다. 단목丹牧에 사는 일파一派에서는 조선 중기 이후로 많은 선비들이 나와 강우江右의 유림儒林을 주도하여 왔다. 그 가운데서 효우孝友, 충의忠義, 사관仕官, 지절志節, 학문을 두루 갖춘 인물로는 죽헌선생竹軒先生을 추앙한다.
선생의 휘諱는 성惺이요, 자字는 자경子敬이요, 죽헌竹軒은 그 호號이다. 고조는 창신교위彰信校尉 휘諱 유鮪고, 증조는 안주목사安州牧使 휘諱 우치禹治고, 왕고王考는 승사랑承仕郞 휘 諱 숙淑이고, 황고皇考는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지낸 휘諱 진보晉寶인데 남명선생南冥先生의 제자이다. 비위妣位는 숙인 전의이씨全義李氏 공도公度의 따님과 숙인 진양정씨晉陽鄭氏 선전관 수익宣傳官壽益의 따님이다. 생부는 증이조판서 진평군 휘 위보贈吏曹判書晉平君諱魏寶이고, 생모는 사천이씨泗川李氏) 참의 륜參議綸의 따님이다. 선조 신미 1571년 음력 12월 5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기가 비범하였고 신중하고 근면하였다. 천성적으로 효우하여 진평군晉平君이 특별히 애정을 기울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고 실질적인 일에 힘썼다. 자라서 수우당 최영경공守愚堂崔永慶公을 따라서 배웠는데, 이치理致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도의를 연마하고 지절志節에 힘써 그 당시 여러 선비들의 추중推重을 입었다.
1591년 진평군晉平君의 상喪을 당했는데 난리 중에도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상례喪禮를 치렀다. 탈상 후 망우당 곽재우 장군忘憂堂郭再祐將軍의 진영陣營에 가서 작전을 도운 것이 많았는데, 화왕동고록火旺同苦錄에 그 사실이 다 수록되어 있다.
정유 1597년에 아우 단주공丹洲公 변忭이 왜적에게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公은 兄 창주공滄洲公과 아우 단지공丹池公과 함께 19년 동안 부산항釜山港을 왕래하며 정황을 알아보아 환송을 위하여 노력하여 마침내 아우가 생환生還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효우가 감동시킨 바라 하여 시詩로 읊어 칭탄稱歎하였다. 창주공滄洲公이 후사後嗣가 없어 자기 아들 달도達道를 양자養子로 세워 가계家系를 잇게 하였다. 계묘 1603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추천으로 효경전孝敬殿 참봉參奉에 제수되었다.
그 뒤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를 거쳐 장수현감長水縣監으로 부임했다. 그 때는 임진왜란을 막 겪은 뒤라 고을이 매우 피폐했고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웠는데, 자혜롭게 백성들을 자식처럼 보살피고, 아전들을 단속하여 공정하고 청렴하게 고을을 다스렸다. 번거로운 일을 제거하고 전쟁에 시달린 백성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었다. 고을의 백성들은 오랫동안 그 德을 칭송하였다. 청렴하다는 이름이 있어 국왕이 그 치적治績을 가상히 여겨 흰 말을 내려 포상하였다. 그 당시 조선 태조의 어진御眞을 전주로 옮겨 봉안奉安하려 했는데, 그 곳에서 과거科擧를 거행하여 그 일을 경축하고자 하였다. 당시 전라도全羅道에서 고을 원으로 있는 사람 가운데 과거출신科擧出身 아닌 사람은 응시할 수 있었다. 그 때 실권자實權者가 선생이 덕망이 있기에 발탁할 의도를 갖고서 합격시키려고 작정하고 있었으나, 선생은 끝내 응시하지 않고, 그 해 가을에 임기를 마치고 귀향하였다.
동계桐溪 정온선생鄭蘊先生과 도의지교를 굳게 맺었는데,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幽閉하자 동계桐溪와 함께 연명으로 차자箚子를 올려 강직하게 간諫하니, 그 당시 세상에서 아침 햇살에 봉황새가 우는 격이라고 일컬었다. 임술 1622년에 이르러 대북세력大北勢力이 더욱 치성熾盛하여 조정이 날로 문란해지자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아우 단지공丹池公과 함께 탄핵하는 소疏를 올리고 대궐 문앞에 삼일 동안 엎드려 있었으나 비답이 내리지 않아 남쪽으로 돌아왔다. 정묘 1627년 후금後金이 침공해 왔을 때 고을 사람들이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선생을 장사將師로 삼았다. 의병을 이끌고 상주에 이르렀을 때 화의의 소식을 듣고 회군하였다. 벼슬에서 물러나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 형제들과 더욱 우애를 돈독히 했고, 의리에 서로 힘썼고, 재산에는 구분이 없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후한 순씨後漢荀氏 집안의 팔용八龍에 견주었다. 자제子弟들을 옳은 방법으로 가르쳤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 언행言行을 보고서 선생 집안의 자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조카 달영達永이 조실부모早失父母하였기에 집에서 거두어 길러 성취시켰는데, 마치 친자식처럼 했다. 늘 모친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겼다. 자신의 회갑 날이 곧 모친 기일忌日이라 애모哀慕하는 마음을 더욱더 이기지 못하여 글을 지어 고하니 듣는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만년에 성리학性理學을 더욱 정밀하게 공부하여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등에 주석注釋을 붙여 후학들을 지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시詩를 읊조리면서
강호江湖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생활하면서 세상을 잊고 지냈다. 노파 이흘 蘆坡李屹, 부사 성여신浮査成汝信, 한사 강대수寒沙姜大遂, 죽각 이광우竹閣 李光友, 겸재 하홍도謙齋河弘度, 태계 하진台溪河溍, 조은 한몽삼釣隱韓夢參 같은 분들이 서로 학덕을 강마하는 사우들이었다.
경진 1640년 7월 이십칠일에 서세逝世하니 향년 칠십 세였다. 여러 사우들이 통석痛惜함을 이기지 못했다. 진주 고을 북쪽 명석면 계원리 산 116번지 태좌兌坐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선생의 진영眞影이 남아 있어 단목에 따로 경죽당景竹堂이라는 집을 지어 봉안하여 지금까지 매년 차례菜禮를 거행하고 있다. 배위配位는 초계정씨草溪鄭氏로 참봉 사겸思謙의 따님이다. 혈육이 없다. 묘소는 합천군 청덕면 가현리 건좌乾坐의 언덕에 있다. 계배繼配는 현풍곽씨玄風郭氏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재록再祿의 따님이고, 감사監司 월越의 손녀로 곧 망우당忘愚堂의 질녀姪女였는데 부덕이 있었다. 묘소는 공의 묘墓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사남 일녀를 두었는데, 수의부위修義副尉를 지낸 달원達遠, 달유達悠, 달도達道, 진사 달장進士達長이다. 따님은 양륜梁崙에게 시집갔다. 달원達遠은 이남 일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보潽와 원沅이고 따님은 첨지 송정필僉知宋廷弼에게 시집갔다. 달유達悠는 일남을 두었으니 청淸이다. 달도達道는 창주공滄洲公의 양자養子가 되어 이남일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생원 명生員洺과 홍泓이고, 따님은 참봉 정기헌鄭岐憲에게 시집갔다. 달장達長은 일남사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선교랑宣敎郞 속涑이고, 따님은 김설金薛, 이영진李榮震, 윤선尹璿, 이세무李世茂이다.
아아! 선생은 근도近道한 자질을 타고나 부지런히 공부하였고, 남명선생南冥先生의 고을에서 생장하여 남명의 제자인 부친과 수우당의 가르침을 직접 받아, 남명의 경의지학敬義之學과 출처대절出處大節을 계승하였으니, 그 학문과 경륜經綸을 짐작할 만하다. 가정에서는 효우를 다하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강직하게 간언을 하는 기풍氣風이 있었다. 국난에 임해서는 적개敵愾하는 용기가 있고, 난정亂政을 보고는 단호하게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조용히 학문에 전념한 지절이 있었다. 당시 사우들의 만제挽祭를 보면 선생의 학덕을 충분히 추상할 수 있다. 문집 죽헌집竹軒集이 간행되어 있어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알 수 있다. 시문은 간절懇切하고 측달測怛하여 세상을 걱정하고 사물을 사랑하는 내용이 많다.
아아! 선생이 사세辭世한 지 사백 성상星霜이 가까워 온다. 참다운 선비로서의 그 훌륭한 자취가 사람들의 생각에서 점점 사라져 간다. 이에 선생의 자취를 천추에 영원히 불후不朽하도록 하자고 하여 후손 현 함안군수 성식盛植이 창도倡導하고 거자巨資를 먼저 출연하였다. 이에 여러 후손들이 각자 성의誠意를 표시하여 유림儒林들의 도움을 얻어 이 비역碑役을 시작하게 되었다. 돌이 준비되자 14세 주손 병권冑孫炳權과 후손 재명在明이 죽헌집竹軒集 및 관계된 문집文集을 갖추어 불초不肖를 찾아와 청문請文하였다. 불초不肖가 평소平素에 선생을 존모尊慕하여 그 문적文籍을 열독閱讀한 바 있었으므로 크게 사양하지 않고 문집과 관계문적關係文籍을 상고하여 선생의 생평生平과 사적을 서술하고 뒤에 명銘을 붙인다.
진양산수 정기 받은, 진양하씨 성벌盛閥이라. 평장공平章公의 뒤를 이어, 명공석덕名公碩德 뇌락부절磊落不絶. 조선왕조朝鮮王朝 선조조宣祖朝에, 구형제九兄弟가 찬연燦然했네. 걸특傑特하신 죽헌선생竹軒先生, 유림중儒林中에 교초翹楚였네, 천자天資 이미 정영精英한데, 근성勤誠으로 치학治學했네. 수우당守愚堂과 부친父親 통해, 남명南冥 학문學問 접맥接脈했네. 천부적인 그 효우에, 진충盡忠하여 창의구국倡義救國. 난정亂政에는 바른 상소 참된 선비 전형典型이라. 경륜經綸펼칠 때 아니라, 강호江湖에서 침명沈冥했네. 경서강독經書講讀 후학양성後學養成, 다음세대世代 기약했네. 훌륭하신 그 자취가 광음光陰흘러 점차 인멸湮滅. 후손들이 간성懇誠 쏟아, 불후不朽하길 도모하네. 아름다운 행적行蹟 모아, 궁비穹碑 세워 새겼다오. 천추만세千秋萬世 흘러가도, 죽헌선생竹軒先生 증명하리.
庚寅2010年 葉月 初旬.
文學博士 慶尙大學校敎授 金海 許捲洙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