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선(河璿)
강개(慷慨)의 시정을 요하는 상소
엎드려 생각하건대, 신은 영남(嶺南)에서 나서 자라나 시골에 살았으므로 이미 경륜(經綸)할만한 학문이 없고 군사(軍士)를 부리는 방법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강개한 마음을 품고서 개나 말과 같은 나이로 쓸데없이 늙었습니다. 옛날 과부도 오히려 주(周)나라가 망하는 것을 탄식하였는데, 하물며 분에 넘치게 벼슬하던 사람으로 어찌 깜깜한 방에서 하는 근심이 없겠습니까? 짚으로 만든 개와 같은 제가 궁궐문 아래에서 한 번 부르짖고자 하였으나 분수에 벗어나는 잘못을 싫어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입을 열지 못한 것이 평생이었습니다.
요즈음 성상(聖上)께서 즉위하셔서 새벽에 옷을 갈아입고 해질녘에 점심을 먹을 정도로 부지런히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시어 야외(野外)에서도 병폐를 고치는 일에 이롭고 적용할 수 있는 말을 듣고자 하시니, 신은 비록 어리석고 망령되지만,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던 차라 대략 몇 가지 조목을 말씀드리고자 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마음을 비우시고 이것을 받아들여 주시옵소서.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의 국토는 세 면에서 적의 침임을 받는 처지이므로 건국 초기부터 성城과 해자垓子, 해군과 활과 화살 등의 무기와 육군, 수군, 기병, 사병을 배치하여 완비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한 번의 임진란을 막아내는 데 계책이 없어 삼도(三都), 한양․경주․개성 가 무너졌습니다. 그러한 때에 오로지 명明나라 군대의 지원을 받은 뒤에야 겨우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뒤에 산성(山城)과 포수(炮手)와 통영(統營)과 어영(御營)을 설치한 것이 굳건하고 튼튼함이 전에 비하여 곱으로 증강되었으나 정묘(丁卯) ․ 병자(丙子)년의 두 번 호란(胡亂) 때에 적병이 한양에 침입하자 마침내 낭패함에 이르렀습니다.
지금껏 20년이 지나도 헛되이 군비만 축낼 뿐 개선할 계책은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곧 국가가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이 시달리게 될 것이니 형세가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시골의 어리석은 자들도 울타리를 보수하여 닥쳐올 우환에 대비하고 짐승이나 미물도 발톱과 이빨로서 또한 그 몸을 보호하는데, 어찌하여 당당한 천승(千乘)의 나라요 팔도(八道)의 힘을 지니고서 어찌할 수 없다고 팽개쳐 두어서 이웃 나라의 외교 담당자들을 즐겁게 하십니까?
신은 몰래 50여 년간 나라를 방어함에 이기고 졌던 흔적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군병과 무기는 천하에서 막강하나, 싸워서 지키는 것은 실패하니 천하에서 더없이 약합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장수들은 전쟁에서 진(陣)을 치는 방법을 모르고 군사들은 훈련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장수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모든 곤백(閫伯)이 된 자는 높은 아기(牙旗)와 큰 독기(纛旗)를 세우고 금과 옥으로 치장한 휘장(揮帳)을 번뜩거리면서 평소에 육지와 바다의 구석구석에 별 탈이 없으니 단지 형장(刑杖)을 쳐서 취렴하는 것으로 잘난 체 합니다. 변방의 장수와 지역의 수령들은 각기 측근을 잘 모시기에 힘쓰고, 또한 군기(軍器)와 군량(軍糧)을 따로 조달하여 살림을 불리고 품계를 높이는 것을 잘하는 일로 여기어 군인과 백성들을 침탈합니다. 혹은 서로 바꾸어 장사하면서 시장에서 협박하고, 혹은 민가에까지 두루 쌀을 사들이고 내다팔기도 하면서 말과 배로 실어 나르는 것이 육로와 수로를 잇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생선과 소금 등 물화의 이로움은 서울로 가는 길에서는 천하나 생산지에서는 귀하니, 해산물이 상공(上供)에만 모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닷가의 사내들 또한 먹고살 방법이 없어서 연변과 국경지대는 대부분 비어 있습니다.
군졸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서울에는 군대의 명칭이 이미 네댓 종류가 있고, 지방의 군대도 십여 종류가 있습니다. 각기 소속이 있지만 하나도 정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른바 ‘속오군(束伍軍)’이라는 것도 공 ․ 사의 노비와 의지할 곳 없는 유민(流民)에 지나지 않으니 겨우 그 숫자만 채우고 있습니다. 이른바 ‘정병(正兵)’이라는 것도 나이를 따지지 않고 오륙 칠팔 구세 이상부터 그 숫자를 채웁니다. 한 집에 아비와 아들 형과 아우가 비록 서너 명이 있더라도 각기 그 병역이 있습니다. 장성한 자는 정병의 장정이지만, 속오를 겸하고 있으니 몸은 하나이지만 병역은 두 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정正’이라는 이름은 도리어 빈이름이 되고 속오가 실제 원액(元額)이 됩니다. 신역(身役)과 가포(價布)를 변방의 장수들에게 전적으로 맡기니 또한 전결(田結)과 요역(徭役)으로 이중의 침해를 당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여름에 솜옷을 입고 겨울에 칡베 옷을 입어서 계절도 거꾸로 쇠고 봄에는 베를 짜고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도 배고프고 배부름이 때에 맞지 않습니다. 이미 마음에 변함없는 생업이 없는데 무슨 전투 기술을 기대하겠습니까?
병사를 일으킬 때에 표신(標信)이 한번 내리면 독촉하는 명령이 불처럼 급하여 하루 밤낮에 산과 들이 진동하니 즉각 길 떠날 차비를 하여 전쟁터에 곧바로 달려가서 점고(點考)를 기다리려고 이틀 걸을 거리를 하루 만에 달려갑니다. 이들은 모두 호미로 밭을 매고 낫으로 풀을 베던 자들입니다. 그러니 활은 줄도 활집도 없고 화살에는 깃과 촉도 붙어있지 않고 총탄에는 녹이 슬어 있으며 화약은 젖어서 재가 되어 있습니다. 입을 것 먹을 것 신을 것 등을 주머니와 자루에 넣었으니 짐바리처럼 되어 무거운 것을 지고 급하게 달려 왔으니, 발과 등은 부르텄고 눈동자는 핏발이 서 있으며 머리는 풀어 헤져지고 이가 머리와 갈옷에 가득하며 바람에 빗질하고 비에 머리감고 길에서 자고 먹으니, 열흘이나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짐승이나 귀신의 형색이 됩니다. 더욱이 우레와 같은 군령이 내려지고 전세는 번개처럼 다급하니, 채 싸우기도 전에 다리가 벌벌 떨리고 날씨가 차지 않아도 마음은 춥습니다. 전투 기술은 믿을 게 없고 두려운 생각이 먼저 일어나게 마련입니다. 이 같은 약하고 바싹 메마른 형세로 멧돼지 같이 맞닥뜨려 오는 철기(鐵騎)를 만나면 씩씩한 자도 갑옷을 벗어 버리고 숨고 달아나며, 약한 자는 무기를 질질 끌다가 고깃덩이처럼 죽는데, 어느 겨를에 활을 쏘고 총을 쏘면서 한 명의 적과 맞서서 한 번의 승리라도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군졸은 앉고 일어서고 치고 찌르는 용맹이 없고, 장수는 병졸을 부리고 전쟁을 잘 하는 지혜가 없습니다. 때문에 달천(㺚川)에서 왜적을 막는데 장안의 천만병을 거느리고 큰 강물을 등지고 진(陣)을 쳐서 하루아침에 전멸 당하였고, 쌍령(雙嶺)에서 오랑캐를 막을 때 장사진(長蛇陣)과 학익진(鶴翼陣)을 쓰지 않았기에 삼도(三道), 경상도․충청도․전라도 가 짓밟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주장(主將)이 기미를 살피고 변화에 적응하며 나아가서 싸우고 물러나서 지키며 지형을 살피고 형편을 살피며 행군하고 진을 치는 데 능하지 못한 과실과 또한 허약한 군졸을 미리 연습하여 정예(精銳)로 만들지 못한 소치입니다.
뿐만 아니라, 국법이 엄격하지 못하고 군정(軍政)이 밝지 못합니다. 전쟁터에서 물러서는 자는 편안하게 살면서 벌을 받지 않습니다. 힘껏 싸우다가 죽는 자는 비록 몇 년이 지나도 물고(物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자손이나 이웃에게
오히려 가포(價布)를 징수합니다. 군졸이 된 자는 가난하고 괴로우며 원통하게 살아가므로 살아남아도 죽은 것과 차이가 없으니, 어찌 원한이 있는데 충성하기를 바라겠습니까?
또한 병자호란 때, 각 도의 군병과 유생들의 의병이 일시에 일어났습니다. 많은 군대의 군량을 각기 그 관청에서 전쟁터로 바로 운송하여야 하였습니다. 뭍에 있는 읍邑 뿐만 아니라, 바다에 있는 섬 가령 남해, 거제 등의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백성들까지 모두 남자는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군진(軍陣)에 운반하였습니다. 문경 옛 고개 아래에 이르러 두미(斗米)를 필목(疋木)으로 바꾸지도 않았는데, 새재 밖의 군량을 모두 적군들이 가져가게 된 것도 남녀 백성들을 괜히 놀라게 하여 모두 달아나 숨어버리니 적병이 침범하기도 전에 지역이 모두 비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대개 군대의 식량은 군대가 이르는 각 읍에서 쌓아 두었던 곡식을 내어 먹인 뒤에 조금 난이 그치기를 기다려서 조용히 운반하여 갚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병사들과 백성들이 한번 어지러워지면 법과 명령으로 통제되지 않으니, 달아난 병사를 찾아서 군대로 복귀시키라는 명령이 날마다 몇 번 내려와도 그 때의 인심은 차라리 죽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것도 평소에 법을 강론하여 확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군안(軍案)을 단속한다는 것도 달아났거나 죽은 사람을 고쳐서 채워 넣습니다. 백성의 수는 한정되어 있고 속오를 마치는 것은 기한이 없습니다. 시골에 한가롭게 노는 자라고 하는 것도 쇠잔한 선비와 서민과 과부집의 부역을 맡고 있는 노비의 자식들에 불과합니다. 해마다 속오를 고치는 일을 하므로 군안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자라도 갖은 방법으로 면제받으려고 하니, 한 명을 바르게 고치면 백 명이 면제받으려고 달려들고 백 명 중에 재물이 있는 자는 군역을 면할 수 있으니, 가난한 자가 그 자리를 대신 채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군안은 늘 부실하고 민간에는 오히려 소요만 일게 되는 일이 해마다 있는 보편적인 근심입니다. 군졸이 많으면 그 폐단도 커지니 이것이 나라를 걱정하는 하나의 큰 조목입니다.
만약 국가의 안위(安危)가 인심이 어떠한지에 달려있다면, 인심이 굳건하지 않으면 나라의 근본도 굳건하지 않을 수밖에 없고 인심이 굳건하다면 나라도 위태롭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의 인민들은 모두 전쟁 후에 태어나고 불어난 자들이니 일찍이 전성시대에 법전이 분명하게 시행된 것과 기강이 엄격하고 가지런하였던 것을 모릅니다. 모두 당장 편한 것만 찾고 게으른 습속이 생기고 염치가 없으니 이미 볼만한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여러 번 전쟁을 겪었는데도 국(세國勢)가 근근이 이어져서 끊이지 않는 것은, 오직 사대부들이 풍속을 유지하고 기강을 잃지 않으며 200여 년간 조종(朝宗)께서 덕을 쌓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든 것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떼 지어 구물거리는 천민과 어리석은 백성, 노비들은 법으로 다스리면 백성이 되지만 버려두면 짐승에 가깝게 됩니다. 병자호란 이후, 선비들의 기풍과 백성들의 습속이 갑작스레 변하여 무너졌습니다. 상하의 신분이 문란하고 노비와 주인이 구별이 없으며, 농사짓는 자는 씨 뿌리고 거두어들이는 데 부지런하지 않고 장사는 헛되이 말업(末業)에만 종사합니다. 생활하는 데 부담감을 갖고 아침저녁으로 살 길을 찾아도, 사는 데 안정된 가정이 없고 가는 데 정해진 방향이 없습니다. 오늘은 우도(右道)로 내일은 좌도(左道)로, 지난해는 영남에서 내년은 호남으로 떠도니, 헤매는 백성들로 길이 가득하고 마을에서 풍속이 변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빚을 지고 세금을 내지 않고 달아난 자들과 죄를 짓고 부역을 회피하는 무리들이 모이고 흩어지는 것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관청에 일이 있으면 관리가 도망하여 숨고, 나라에 변고가 있으면 군졸들이 흩어져 달아나니, 하물며 서민집의 부역하기를 싫어하는 노비들이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한 백성의 기쁨과 근심은 농토가 기름지고 메마른가와 세금과 요역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데 달려 있습니다. 지난 갑술(甲戌),1634 에서 을해(乙亥,1635)년 사이에 삼남에 토지 조사를 하였습니다. 국령이 매우 엄하고 사신(使臣)이 급하게 독촉하여 토지 품질의 높고 낮음으로써 그 복속(卜束)을 감히 조정할 수 없었습니다. 평시의 결수(結數)에 의거하지 않은 듯합니다. 옛날 8·9등급이던 것이 지금은 6·7등급이 되고 옛날 6.7등급이던 것이 지금 3.4등급으로 된 것이 반이 넘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결복(結卜)은 비록 같지만 평상시의 조세와 요역은 백배에 이릅니다. 전세미(田稅米)는 대부분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규정이 있습니다만, 그 나머지 삼수량(三手糧), 사포량(射炮粮), 왜공량(倭供粮), 찬미(饌米), 북폐(北幣), 상중(上中)의 목가미(木價米)와 본관에서 부과하는 요역(徭役) 외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쌀과 베를 내는 것을 일일이 셀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입니다. 한 고을을 보면 한 도(道)를 알 수 있고 한 도를 보면 삼남(三南)의 형편을 알 수 있습니다.
무릇 이와 같이 온갖 것을 감당하는 재화는 모두 전결(田結)에서 나오는데 전결은 일반 서민들에게는 많지 않고 모두 양반집에 있습니다. 이른바 양반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종들을 수족(手足)으로 삼아서 살아갑니다. 만약 수족이 없다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할 수 없습니다. 옷과 음식이 없다면, 농사짓고 세금을 내고 혼례·상례·장례를 치르는 것들이 모두 제 때에 맞게 행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러면 곧 예의와 염치가 없게 될 것이며, 예의와 염치가 없다면 사람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난리를 겪은 뒤에 다소의 노복들이 반 정도는 여러 종류의 군병으로 뽑혔습니다. 궁궐 노예로 들어가기도 하고 역속(驛屬)에 의탁하기도 하고 세력이 있는 집안에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나머지는 군역의 복무를 피하여, 중과 비구니를 따라가기도 하고 무당이 되기도 하여 멋대로 배반하고 흩어졌습니다. 주인을 배반하고 달아난 자의 거처를 추적하였더라도 세력이 없다면, 각 곳의 수령들이라도 온전히 내주지 않습니다. 패거리를 이루어 배반한 노비가 도리어 몽둥이를 메고 설치다가 끝내는 사람을 죽이고 해치는 자가 숱하게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쇠잔하고 매우 곤궁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생각하건대, 남자로서 정병(正兵)인 사람의 대부분은 노비가 없는 양반들입니다.
또 최근 삼사십 년간 세상의 도의(道義)가 점차 타락하고 요사스럽고 괴이함이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비구(比丘)와 비구니(比丘尼)의 무리가 시장의 반을 차지하고 무당의 무리들이 동네에 섞여서 사니 풍속이 문란하여지고 인심을 홀려서 어지럽힙니다. 옛날 중들은 후미진 산에 깊숙이 살면서 불경을 공부하고 도를 지키는 것을 숭상했으나, 지금 중이 된 자들은 산사(山寺)의 암자에 있는 것을 천하게 여기고 오로지 소와 말을 몰고 와서 장사를 하고 군졸의 자식과 양반의 노비들을 유인하는 것을 일로 삼고 있습니다. 나이가 겨우 열 살만 되면 갑자기 이끌고 가서 머리를 깎이니, 아이들의 다수가 행동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옛날의 중들은 모두 늙고 병들어도 믿고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지금의 중이 된 자들은 나이가 젊어서 군역을 피했고 아내와 자식을 이끌고 산골로 들어가서 불당(佛堂)을 설치하고 중과 한 덩어리가 되어 조직을 만들고 떼를 지어서 제멋대로 놀고먹습니다. 혹 다른 사람이 혐의를 알리면 불을 지르고 살인하여 도적이 되는 우환이 있습니다.
여자 무당과 박수무당의 대부분은 서로 어울려 노래 부르고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이고 홀려서 저주하는 변고를 일으키고, 나아가 재앙을 퍼뜨리는 단초가 되고 있는데, 남쪽 지방이 더욱 심하여 집집마다 모두 그러합니다. 가정이 패망한 경우도 있고 가문이 없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심한 경우는 집의 사당과 조상의 무덤까지도 흉하게 흩어버리지 않음이 없고 자손과 골육도 영원히 아끼고 애태우는 마음이 없으니 부모가 병이 들어도 괜히 끝없는 슬픔만 갖고 아내와 자식이 죽어가도 의원과 약으로 치료하지 않고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니 주검이 쌓여 방에 가득합니다.
범죄자가 남긴 흔적이 뚜렷하여도 재판관이 다스리지 않고 불러서 두렵게 할 방법이 없으니, 그 병환을 귀신이 범한 것으로 지목하고 재산을 다 써서 기도하게 합니다. 산이면 산, 골이면 골에 모두 신당(神堂)과 음사(淫祠)를 세우고 또한 집집마다 신당과 귀신의 움막을 설치하여, 북과 꽹과리 소리와 너풀너풀 추는 춤이 귀와 눈에 끊어지지 않고, 사람과 귀신이 뒤섞여서 살아가니 거의 사람과 귀신을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인심이 착하지 않기 때문에, 까마귀가 모이는 것처럼 질서가 없이 멋대로 옮겨 다니면서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무리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구와 비구니, 여자 무당과 남자 무당, 행상(行商)과 앉아서 하는 장사(賈),이 여섯 종류의 백성은 모두 농사를 짓지 않고 손을 놀리는 자들입니다. 농사 짓는 자는 한 명이나 집에서 이를 먹는 자는 세 명이라면 한 나라에서도 먹는 자는 셋이고 나라 안에는 또 이 여섯 종류의 백성이 있다면, 한 농민 외에 하늘같은 백성을 병들게 하는 자는 열에 팔구 명이 됩니다. 백성이 어지러운데 나라가 어지럽지 않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나라를 걱정하는 두 번째 큰 조목입니다.
아! 한 시대에 안고 있는 두 가지 병폐가 이처럼 중대하다면, 임금님의 염려 아래 조정 묘책에 어찌 잘못을 바로잡고 백성을 구제할 좋은 계책이 없겠습니까만, 어리석은 신이 얕은 견해와 시세에 밝지 않은 말을 이미 앞에서 진술하였는데 감히 뒤라고 다하지 않겠습니까? 분수에 넘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대저 남쪽과 북쪽의 변방은 굳게 닫아서 지켜야 할 중요한 땅입니다. 대장을 가려 뽑는 것은 반드시 비변사(備邊司)에서 매우 상밀히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자주 교체하므로, 노장(老將)과 오래된 군졸이 친애하는 도리가 없고 법제를 새롭게 함으로써 대오(隊伍)를 정돈하고 정비하는 변함없는 습관이 없습니다. 진영(鎭營)에서 생활이 꼼꼼함이 없이 데면데면하고 전쟁에 임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게 됩니다. 대개 새로 교대된 해에는 아직 자세하게 알지 못하고 전부터 하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던 것을 도상(圖像)하려 합니다. 임기를 끝내고 교체되는 해에는 군정(軍政)을 폐기하고 짐을 싸는 데 오로지 힘쓰게 됩니다. 삼 년 임기 안에 2년을 오고가는 데 허비하니, 단지 군졸들의 긴 병영생활에 해만 끼칩니다. 새로운 장군을 맞이하고 옛 장군을 보내는 것 또한 간리(奸吏)들의 보자기와 자루를 채우는 술책에 이용당합니다. 군과 국가의 존망存亡은 이 허실(虛實)에 달려 있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계책은 그 직책을 잘 수행하는 자는 비록 십년 동안이라도 도성(都城) 밖을 맡겨서 오로지 한 지역을 지키는 한편, 궁궐을 굳게 지켜서 먼 지방을 안정시켜야 합니다. 중신(重臣)을 자주 보내어 몸소 살피게 하고 돈독하게 타이르며 장렴(贓廉)의 규율을 밝히고 잘하면 직위를 올려주고 못하면 내치는 법을 엄격하게 하여, 재물을 긁어모으고 더러운 짓을 하거나 형벌을 함부로 쓰거나 교만하고 멋대로 하거나 군졸을 학대하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합니다. 군병을 거느리고 있는 각 영(營)에 해마다 바치는 군병의 가포(價布)가 몇 천 통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으로 군기(軍器)를 만들고 지휘용 깃발을 보충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물며 통영(統營)은 삼도(三道)의 수군(水軍)을 아우르고 있으므로 그 곳에서는 온갖 물품이 교역되고 큰 배와 군함이 바다를 덮고 있으며 날마다 달마다 바쳐지는 것이 많은 창고의 상자에 넘쳐나고 각 읍邑의 창고에 쌓여 있는 것도 산더미 같은데, 괜히 그들 자녀의 혼인 예물의 비용이 되게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군자(軍資)를 넉넉하게 돕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모든 수군의 기계와 군 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구, 병기, 깃발, 삼수량(三手粮) 등을 본영(本營)에 전속시키고, 즉시 명령을 내려서 전결(田結)을 징수하는 것을 영원히 혁파하여 농민의 힘을 펴 주는 것이 어떠합니까?
군액(軍額)에 관한 법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갑자기 개혁할 수 없으나 적을 제압하고 이기는 전략은 때에 따라 융통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병사들을 정예에 힘쓰게 해야 하지 잡다한 것에 힘쓰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진실로 정예만 되면 한 명이 백을 감당하나 정예가 아니면 백 명이 한 명도 감당할 수 없으니 비록 많더라도 무엇에 쓰겠습니까?
그래서 옛날 주(周)나라 세종(世宗)이 “농부 백 명이 한 명의 전사(戰士)를 돌볼 수 없으니, 하필이면 백성의 고혈(膏血)을 빨아 이 쓸데없는 것을 육성하겠는가?”라 하고, 모든 군졸들 중에서 전사를 대략 가리고 세밀하게 선택하여, 사졸을 거느리고 정예로 만들게 하니 가는 곳마다 앞에는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 또한 본받을 만합니다.
어리석은 신의 계책은 한 국가의 군안(軍案)에는 원래의 인원수가 모두 합쳐져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 뒤에 그 양민(良民)들 중에서 뽑아서 정병(正兵)을 세워야 합니다. 15세부터 45세까지 그 30년 동안, 활을 쏘는 자는 활을 쏘게 하고 포를 쏘는 자는 포를 쏘게 하며 말을 타는 자는 말을 타게 하고, 등용되어 관직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장악하는 관리로 삼아서 살피고 감독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 잘하는 바에 따라서 세 등급으로 나누고 밤낮 쉬지 않고 기거할 때도 버려두지 않고 항상 익히게 하면 그 재주가 매우 뛰어나게 되어 제일의 무적이 될 것입니다. 잡인(雜人)은 속오군(束伍軍)에서 빼고 각기 다섯 명으로 정병을 삼는데, 한 사람의 봉족(奉足)이 그들의 안장과 말과 병기와 옷과 먹을 것을 각기 정해진 수에 따라 계속해서 대는데 힘쓰게 하고 그 전결과 요역은 또한 관청에서 민가로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 신상에 안장 ․ 말 ․ 병기 ․ 옷 ․ 음식 ․ 아내 ․ 자식에 대한 염려를 없게 만든 뒤에, 각 관청에서 가까운 빈 땅을 주어 따로 한 부(部)를 만들고 항상 그곳에 있게 하여야 합니다. 그 부 안에서 시장을 열고 많은 장인匠人을 소속시켜 바깥으로 출입하지 못하게 하고 시장에도 가지 않고 다른 사람과 서로 어울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금하는 법을 엄격하게 세워서 평소 그 한 업에 전념하게 하여야, 난리를 당하면 용감하게 적에게 달려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봉족 다섯 사람 중에서 몇 명을 가려내어 집에서 무예를 닦게 하고, 변고가 있으면 함께 전쟁터로 달려가서 뒤따라 다니면서 의식(衣食)과 군용품(軍用品)을 공급하게 하다가, 정군이 사망하면 즉각 그 대신 채우게 합니다. 그러면 대오가 혼란스럽지 않고, 관청에서 불 때는 장정과 군졸을 줄이는 데 충당되는 비용이 없게 되며 군대에서는 얼거나 굶주리고 군수품이 모자라는 근심이 없게 됩니다.
적진과 대치하여 나아가 싸우고 물러나서 지키고 할 때에 병력의 세력이 많게 되니 군졸들의 함성이 배나 크고, 나에게 있는 무예는 이미 뛰어나고 뒤에서의 지원도 갖추었으니 마음은 교만한 바도 있고 반드시 재주를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도 있을 터이니 적을 대하여 용기가 불쑥 나서 남 뒤에 서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다투어 앞장서서 달려가게 됩니다. 나아가는 자는 공로를 인정하고 물러서는 자는 참수하며, 뒷날 논공행상(論功行賞) 할 때에 전사자는 관작을 추증하고 그 자손은 영화를 누리게 하고 달아나고 피한 자는 그 자신을 참수할 뿐만 아니라 그 처와 자식을 함께 멸망시키면 법은 이미 엄격하고 분명해지며 마음도 굳게 안정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용감한 죽음을 바친다면 이것이 일당백(一當百)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이와 같이 한다면 비록 한 명이 백 명을 당하지는 못하더라도 만약 한 사람이 열 명을 감당한다면, 백이면 천을, 천이면 만을, 만이면 십만을 감당할 수 있으니, 우리 군사가 어찌 만 명이 차지 않는데 적병 또한 어찌 반드시 십만을 넘겠습니까? 수십만으로 각기 수백만을 감당한다면 장평長平의 군졸을 땅에 묻어버릴 수 있고 비수(淝水)의 진(陣)을 격파할 수 있을 정도로 장차 천하에 무적이 될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병법은 모두 그렇기 때문에 싸움에서는 반드시 승리하고 공격하면 반드시 이깁니다. 우리나라의 병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나아가면 망하고 물러나도 패하니, 이것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명확한 징험입니다.
아! 우리나라는 비록 치우쳐 있는 땅이고 옛날에 세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수(隋)나라나 당(唐) 나라가 천하의 병력을 동원하여 쳐들어 와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합쳐서 하나가 되었으므로 세 배로 전성한 안일을 누리면서도 만 리 밖에서 먼 길을 행군해온 피로한 적병에게 늘 곤란함을 당하니 참으로 통탄할 만합니다.
대저 지금 일초(一哨) 중에서 각기 한 명을 뽑아서 다섯 명의 뒤를 돌보게 한다면 반드시 군인의 수가 매우 줄어드는 병폐가 있습니다. 그러나 속오(束伍)라는 필요가 없는 다섯 명을 정병으로 바꾸고 후원하는 세 명을 아우르게 한다면, 명목상으로는 비록 줄어들겠지만 실상은 늘어납니다. 또 하나의 계책이 있습니다. 지금 양반의 자제나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자제, 서얼 ․ 공생(貢生) 각종 산업에 종사하는 무리들이 나이 겨우 이삼십에 글이 되지 않으면 무과를 준비합니다. 익힌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는 자들이 구름처럼 거리와 골목에 가득합니다. 그들이 스스로 “오늘 만약 홍패(紅牌)를 얻는다면 내일 모래사장 위에 백골이 되어도 무엇을 슬퍼하겠는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과(武科)에는 정해진 규칙이 있어서 참여할 길이 없으니 팔짱을 끼고 길게 탄식만 하다가 세상의 한 폐물이 되는 것을 스스로 분수로 여깁니다. 여러 사람의 마음이 답답하니, 세상을 어지럽힐 뜻이 없지 않고 사변이 있으면 벗어나서 도적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게 되는 자들입니다.
지금부터 시법(試法)을 만들어 각 도(道)에 영을 내려서 무과 시험장을 설치하게 하되, 명 수는 한정하지 말고 혹은 남보다 조금 뛰어난 기술로써 혹은 한 기술로써 무과에 합격시키고 홍패를 주되, 한 해에 천 명 혹은 만 명을 취하고 뒤에 또한 중시(重試)와 중중시(重重試)를 설치하여 그 무예를 닦는 일을 그만 두지 않게 하며, 나아가 자신의 뜻을 실현하려는 마음을 막지 않고 그들의 허물을 제거하여 벼슬길을 터준다면 십 년간에 천명이나 만명의 정병(精兵)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면 국가에서 베푼 은혜는 있으나 원망은 없어지고, 그들을 지원하지 않아도 자족(自足) 할 것이며,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연습할 것이며, 백성들이 난동을 부리지 않으니 국가는 이로울 것이고, 군사 양성의 일은 줄어드나 군사들의 단련은 정밀해질 것입니다. 양반들의 노예나 잡인(雜人)들을 빼앗아서 구차하게 군적에 허수(虛數)를 채우는 것보다는 순순히 양가(良家) 호걸(豪傑)의 자제를 얻어서 당당하게 비휴(豼貅)처럼 용맹한 군진(軍陣)을 완전하게 갖추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앞으로 정병(正兵)의 자손이 낳은 자들은 십 년이 넘으면 모두 장정이 될 것이니 그 군역(軍役)을 피하고 죽은 사람을 단속하고 다시 보충하는 일도 근심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한 국가의 군인의 수를 통 털어 계산하여도 반으로 줄어들지 않으면서 그 이로움은 백배나 됩니다. 어찌 하나의 과거 관습을 지키려고 이 백 배나 이로운 일을 버리는 것이 옳겠습니까?
하물며 관직에 임용된 병사와 정병의 군졸이 서로 힘을 겨루면서 다투어 기예를 단련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단지 상과 벌로써 권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병졸이 날쌔고 용맹해지는 것은 자연적인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장수를 이미 잘 뽑았고, 군병도 매우 날쌔고 용감하며, 봉족(奉足)도 충분하고 많으니,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것도 영원히 그 길을 끊고, 군량은 군대가 이르는 곳에서 내서 먹이며, 많은 백성들은 과거에 합격하는 영광을 입게 되어 적에게 달려드는 것을 즐거워하게 된다면, 변방을 방어하는 준비는 여기에서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신이 삼가 옛 제도를 살펴보았습니다. 한(漢)나라의 남북군(南北軍)과 당(唐)나라의 부병(府兵), 송(宋)나라의 상병(廂兵), 명(明)나라의 위병(衛兵) 제도들은 모두 부득이 그때의 형편과 경우에 따라 바꾸고 융통성 있게 처리해 가는 데서 나왔습니다. 지금 이 일은 어렴풋이 한나라와 당나라의 병제(兵制)처럼 병兵과 농(農)을 분리하던 측면이 있으나 해롭지는 않습니다. 공자(孔子)께서 모든 일은 꾀하기를 좋아하면 이루어진다.\"라고 하였고, 맹자도 \"떼를 지어 다니면서 양식을 먹어서 흘겨보며 헐뜯는다.\"하였습니다. 군사에 대한 것은 선비가 익힐 바는 아니나 성현(聖賢)의 말씀은 실로 그 성공을 권장하고 군대를 피로하게 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본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옮겨 갔다가 옮겨 오는 난민의 폐단을 막는 데는 호패(戶牌)가 지닌 장점만 한 것이 없습니다. 지난 정묘(丁卯),1627 에 삼 년을 경영하여 규모가 이미 이루어져 법제를 실행하려고 하였으나, 북병(北兵)의 한 번 난리에 흙 한 삼태기를 채우지 못하여 아홉 길 산을 쌓는데 든 공功이 무너졌습니다. 난리는 이것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닌데, 가볍게 움직여 갑자기 그만두었으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논밭에서 양식이 나오고 백성들이 옮겨 다니지 않으면, 국가와 민간이 아무 탈 없이 편안하고 죄를 지은 사람이 멋대로 날뛰고 기강을 어지럽히는 병폐가 없습니다. 그러니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에 힘쓰고 장인은 공업에 힘쓰고 군사는 군을 위하고 봉족은 지원에 힘쓰고 졸병은 장군을 배반하지 않고 노예는 주인을 배반하지 않아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분수를 지키고 모든 백성은 각기 제 자리에서 편안합니다. 국가의 장래는 이것 때문에 반석에 올려질 것이고 적들은 이것 때문에 두려워 할 것이니, 방어하기 어려운 형세가 어디에 있겠으며 또한 언제 스스로 위태로운 고비가 있겠습니까? 만약 호패법을 시행하고자 하면 그 법칙은 멀리 있지 않고 손바닥을 엎는 것처럼 쉽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계책으로는 빨리 호패(戶牌)의 영을 내려서 한 나라의 명분(名分)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로는 선비와 대부, 아래로는 군병(軍兵) ·공천(公賤)과 사천(私賤) 아전 서얼 공생(貢生)과, 헛되이 놀면서 생업이 없는 자들까지도 각기 소속이 있어야 합니다. 승려가 도첩(道帖)이 없으면서 운수업을 하고 장사를 하는 자는 길 다니는 것을 일절 금하고, 큰 사원 외의 작은 절 암자는 모두 불사르고 산골에서 사는 승려는 쓸어내어 농사를 짓게 하고 그 불당을 불사르며, 마을에 섞여 사는 남녀 무당은 모두 군포(軍布)를 징수하고 산위의 신당(神堂)과 마을 안에 있는 신을 모신 장막들을 모두 철거하여야 합니다. 사노비가 세력가의 집에 거짓으로 의탁한 자는 송관(訟官)에게 문권을 명확하게 조사하게 하되, 잘못 처결하면 관직을 삭탈하는 죄를 물어서 공(功)을 헛되이 바라거나 남의 것을 협박하여 빼앗으려는 마음을 없애야 합니다. 저주(咀呪)의 사건으로 원통함을 알리는 자가 있으면, 송관이 비록 밝게 다스리지는 못하더라도 즉시 재판하여 처리하는 것을 허락하여 그 곡절을 추궁하고 형벌을 엄격하게 시행하면 방자하게 행동하는 폐단이 없어지고, 두려워 움츠리는 풍조가 있게 되어 점차 재앙이 그치는 효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올해도 떠도는 백성을 붙잡아서 고향으로 돌려보내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다수가 부채를 지고 있으니 농사를 그만두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한 유민에게 한 필목(疋木)을 징수하려고 가벼이 한 나라의 백성을 들뜨게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어제 떠돌아 다녔던 것도 괴로운데 오늘 또 필목을 다시 징수할 수 있겠습니까? 우선 그만 두는 것만 못합니다. 가을이나 겨울까지 기다려서 호패법(戶牌法)을 시행한다면 흩어졌던 자들이 다시 모이고 일없이 노는 자들이 소속이 있게 되어 모든 백성이 모두 그 귀의할 곳을 알아서 그 근본에 정착되고 국가도 이로부터 평안해질 것입니다. 전(傳)에서,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하면 나라가 편안하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위에서 말씀드린 두 개 조목은 모두 나라의 큰 병폐입니다. 시급하기가 불 속에서 사람을 구하고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데 여유를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모든 크고 작은 일을 천천히 하거나 급히 시행하는 것은 말하기는 어렵지 않고 이것을 들어주기가 어려우며, 들어주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실천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이것을 실천하는 방법은 오직 부지런하고 굳세어서 홀로 결단하며 힘써 실천하고 떨쳐 일으키는 데 달려 있습니다. 대신(大臣)을 가려 뽑아 임명하여 각기 하나의 책임을 전담시키고 오래도록 맡겨서 직책을 바꾸지 말고 때때로 그 공적을 살핀다면 그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예부터 훌륭한 일을 한 임금은 반드시 한두 명의 충신을 얻어 심복을 만들고 이들과 국정(國政)을 전적으로 의논하여 마침내 공적을 이루었습니다. 만약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하여 망설이고 지나치게 의심하여 일을 맡긴 신하로 하여금 갈피를 잡을 수 없게 자주 명령을 바꾼다면, 직임(職任)을 살필 수 없을 것입니다. 저 것을 믿었다가 이것을 그만두고, 아침에 명령했다가 저녁에 그친다면, 비유컨대 길가에 집을 짓는데 삼 년이 지나도 낙성하지 못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요즈음 도성 바깥의 지역은 한결같이 추목(麤木)을 폐지했다가 다시 쓰고, 사치스러운 풍조를 금지했다가 즉시 그만두었습니다.
배우고 가르치는 기풍을 일으키고자 제독관(提督官)과 교수(敎授) · 훈장(訓長)을 내보냈으나, 선비들의 풍습은 날로 해이해지고 있습니다. 기강(紀綱)을 진작시키려고 향약정(鄕約正)과 유사(有司) · 직일(直日)을 정했으나 민속은 더욱 경박해집니다. 모든 관청의 규정과 문서가 종이에 가득 장황하고 매우 정성스러우며 자세하고 정밀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행이(行移)와 행회(行會)는 겨우 하루 한 달이면 허물거리며 놀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그만두게 되니, 단지 가볍고 나약함만 보여줄 뿐, 명령을 행하고 금지시키는 위엄은 한 번도 나타낸 적이 없으므로 도리어 아이들의 장난과 같습니다. 지금 돈을 만들어 통용시키고자 하여도 실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부터 속담에\"조선 공사 삼 일이면 그만이다.\"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거짓말이 아닙니다.
전하께옵서는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강력하고 명성을 떨칠 수 있는 자질을 지니시고 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려있는 위급한 때를 만나 재앙과 괴이한 일이 거듭 생기고 해마다 흉년이 들어 국가의 기강은 이미 해이해졌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경제력은 고갈된 것이 삼남(三南) 지역이 모두 같습니다. 신은 아마도 우리나라의 근심은 서북(西北)이 아니고 동남(東南)에 있다고 여깁니다.
아! 선비가 하늘과 땅 사이에 날 때 하늘이 부여한 것이 무겁고, 어려서 배운 것은 장성하여 실천하려는 것입니다. 신과 같은 자는 재주가 비록 참나무나 가죽나무와 같을지라도 어찌 만에 하나 일 푼도 쓸모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죽음에 이미 임박하였으니 희망의 길이 끊어진 지 오래되었습니다.
과정(科程)의 대책문(對策文)은 뜻과 사례를 표현하지 못하여 받아들여 지지 않았습니다. 발을 싸매고 천리 길을 와서 한 통의 소(疏)를 올리기도 어려웠습니다. 마침 올해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심하니 조서(詔書)를 내리시어, \"곧은 말을 듣고자 하는데 비록 지나침이 있어도 죄로 여기지 않겠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늙었으니 감히 죽을 만한 말로써 눈으로 본 이러한 폐단을 진술함에 사납고 분수에 넘침이 이미 극에 이르렀으므로 천벌을 면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문자로써 뜻을 해치거나 사람을 보고서 말을 내치지 마시옵고, 조금 굽어 살펴 주시오면 죽는 날이나 살아있을 때나 조정(朝廷)을 찬양하는 것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두려워 떨면서 천만 번이라도 처벌을 기다리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河璿 上疏文
伏以臣生長嶺海跧伏草野旣無經綸之學又昧軍旅之方常懷慷慨之心空老犬馬之年 古之嫠婦尙有傷周之嘆況忝一命豈無漆室之憂乎欲以蒭狗之得一呌閶闔之下而嫌畏越俎之失未敢開喙者平生矣今當聖上臨御宵旰圖治欲聞野外利病適用之言臣雖愚妄 太息流涕痛哭中略陳數條伏惟聖上虛心採納焉恭惟我東方一域以三面受敵之地自國初城池舟師弓矢之器械陸軍水軍騎射之軍兵無不布列完備而龍蛇一亂防禦無策三都瓦解當其時也全賴天兵之來救僅收恢復之功厥後山城炮手統營御營之設牢固堅實比前倍增而丁丙兩變兵入京都終至狼狽今又二十年徒費金繒未聞修治之策此則國家板蕩人民凋瘵勢所固然也然村巷庸夫修補藩籬備其有患禽獸微物以其爪牙亦衛其身 豈以堂堂千乘之國八道之力委之於無可奈何之地甘爲隣國之外府者哉臣竊見邇來五十餘年防禦勝敗之蹟我國軍兵器械則天下莫强而戰守喪衂則天下莫弱此無他將帥不知戰陣之法軍卒不爲鍊習之故也以將帥言之凡爲閫伯者高牙大纛金玉交輝平居陸海部曲無事徒以刑杖聚斂自高邊將守令則各以善事左右又以別造軍器軍糧圖得加資爲能事侵漁軍氓或以貿販㤼於場市或以糴糶遍於民戶馬載舟運連絡水陸以此魚鹽物貨之利賤於上道而貴於本所非但海産乏於上供海居之夫亦無以資生沿邊境界過半空虛矣以軍卒言之京中軍號旣有四五色外方軍號亦有十餘色各有所屬而一無精備所謂束
伍者不過公私奴及無賴流民苟充其數所謂正兵者不計年齒自五六七八九歲以上充其元額一家父子兄弟雖三四名各有其役壯者以正兵本丁兼之以束伍一身而兩役然則正名反爲許名束伍實爲元額身役價布則專委於邊帥谿壑之中又以其田結徭役疊被侵割 故其身則夏褞冬葛寒燠反常春絲秋穀飢飽不時旣無心産之恒又何技藝之望乎至於兵興之時標信一下督令火急一晝夜間山野震動卽刻裝束直赴戰所期以點考倍道驅逐 是皆鋤耰銍刈之徒也弓無絃弢矢欠羽鏃銃丸生綠火藥濕灰衣食鞋器囊橐成卜負重行迫足繭背浮眼赤髮披蝨滿頭褐櫛風沐雨雪餐霜宿未經旬月獸形鬼色加以軍令雷嚴 兵威電急未戰而股戰不寒而心寒技無所恃㤼情先發以如此殘瘦之形勢當如彼衝突之鐵騎壯者棄甲而遁走弱者曳兵而魚肉奚暇發矢放火抗一敵圖一捷哉軍無坐作擊刺之勇將無用兵善戰之智是以㺚川禦倭率長安千萬兵背陣大水而一朝全沒雙嶺防胡棄長蛇鶴翼法方陣深壑而三道敗衂此皆主將不能臨機應變進戰退守審形察勢行師結陣之過亦由於虛弱軍卒不爲豫習鍛鍊精銳之致也非但此也國法不嚴軍政不明臨戰而退後者晏然無罰力戰而死亡者雖經累年不出物故則尙徵價布於其子孫隣里然則身爲軍者 困苦寃痛死生無異何敢望其忠於讐怨之中也且丙子之變各道軍兵及儒生義兵一時俱發萬軍之糧各自其官直運戰所非徒內邑也至於海島中如南海巨濟極邊之民亦男負女戴運於軍前至於聞慶故嶺下斗米不換疋木嶺外駄粟盡齎盜糧又以虛驚士女奔竄敵兵未犯境已空虛蓋軍行之粮所到各邑出食其積峙之穀然後稍待亂止從容運償未爲不可 而兵民一亂法令無統逃兵搜還之令日又疊至當時人心寧死之爲安此亦平日未爲講定規模之故也所謂軍案團束者逃故人改充之爲也而人民有限畢束無期村閭間閑遊云者 亦不過殘瘦士庶與寡婦家之仰役奴子也每年因改束之擧案中雖無故者百般圖免一名之改百人侵之百人中有貨者得免赤手者代充故軍案每不實而民間尙騷擾此年年歲歲之通患而軍多則弊益多此憂國之一大條也若夫國家之安危在於人心之如何人心不固 邦本不固人心堅固國不危矣今之人民 皆亂後生産而滋息者 曾不知全盛時法典之分明綱紀之嚴整 皆以姑息爲務 惰慢成俗廉恥沒喪已無足觀然國家累經兵禍而勢至綿綿不絶者惟士大夫維持風俗不失倫紀無非祖宗朝二百餘年積德休養之有由來也至於下賤庸氓僕隸之林林蠢蠢者法之則人民也逸之則禽獸也自丙子以後士風民俗一變崩壞上下想紊奴主無別農者不勤稼穡商者徒事逐末荷擔生崖朝暮計活居無定家行無所向今日右道明日左道去歲嶺南來歲湖南往來盈路閭里變俗是以負債逋租之類犯奸避役之徒聚散無期官有事則官吏逃躱國有變則軍卒散况士庶家厭役之奴隸不足言也 且民之休戚係於田土之膏瘠賦役之苦歇而已頃於甲戌乙亥間量田三南也國令極嚴
使臣急督故不敢以土品之高下低昴其卜束惟恐不准於平時之結數古之八九等今爲六七等古之六七等今爲三四等者過半是以結卜雖一如平時賦役則百倍於今日田稅米太乃古今不易之定規而其他三手糧射炮粮倭供粮饌米北幣上中木價米及本官徭役 科外名不知米布之出者不可以一二數計而周知也以一州而一道可知以一道而三南從可知也凡此百應之物皆出於田結中田結不多在於小民而皆在於兩班之家所謂兩班云者 必賴臧獲之爲手足無手足則無衣食無衣食則如稼穡貢賦婚喪葬祭皆不得以時應奉 則因無禮義厭恥旣無廉恥有何人事乎何者亂後些少奴僕居半被抄於諸色軍兵或入於內奴或托於驛屬或投於勢家餘存者厭避服役或從僧尼或稱巫覡或無端叛散叛散者 雖或追蹤其居處若無勢力到處守令則全不推給結黨叛奴則反爲荷杖終至殺害者比比有之然則我國之殘弊固窮少無樂生之心者惟多男子之正兵無奴婢之兩班也又以近來三四十年間世道漸汚妖怪成風僧尼之徒居半於場市巫覡之類雜處於閭閻傷風敗俗 惑亂民心古之僧者深處窮山以治經守道爲高今之爲僧淺在野寺草庵專以率牛馬興販業誘引軍士之子兩班之奴爲事年纔十歲者輒率爲髠童多數成行古之尼者必老病而無賴也今之爲尼年少避役率妻子入山谷設爲佛堂僧與尼相表裏結契作黨橫行遊食或爲人報嫌放火殺人作賊之患居多女巫男覡自相唱和誣惑愚氓因興咀呪之變轉爲賣禍之機南方尤甚比屋皆然或有沒家者或有滅門者甚則家廟山塚無不播兇子孫骨肉永無焦類父母方病徒抱罔極之痛妻子將死絶無醫藥之救坐而待死積屍盈室所犯者雖或形跡判然訟官不治徵畏無方加以因其病患指以犯神使之蕩財竭産而祈禱之山山谷谷皆設神堂淫祠家家戶戶又立神堂鬼幕錚敲之聲婆娑之狀不絶於耳目人神雜糅幾不可方物此率由於人心不淑有同烏合任意移徙好爲作亂之徒也吁僧尼巫覡商賈六民皆不農而遊手者也農之者一家而食之者三國三國中又有此六民則一農民外病民之天者什常八九未有民亂而國不亂者此憂國之二大條也噫一時二瘼旣如此重大則聖慮之下廟謨之上豈無匡救之善策而愚臣淺見迂言已陳於前敢不盡於後乎不勝猥濫焉夫南北藩方 鎖鑰重地簡選大將必已詳盡於備邊之司但遞代頻數故無老將宿卒親愛之道法制生新 故無整隊飭伍恒久之習居鎭而疎漏臨亂而蒼黃盖新代之年則未知首末只欲圖像其宿債臨遞之年則廢棄軍政專務修治其行裝三年瓜內往來二年則徒爲侵困軍卒之日月 新舊迎送又爲奸吏用謀之囊槖軍國存亡繫此虛實愚臣之計以爲善居其職者雖十年之久委任閫外專守一方玉門金城封以定遠數遣重臣體察敦諭明贓廉之律嚴黜陟之法 毋有貪汚濫刑驕恣虐卒之弊而兵統各營年年所捧之軍兵價布不知其幾千百同則以此造軍器補旗麾未爲不可也况統營則兼三道舟師其間百物貿販舸轞蔽海日月所捧盈溢於千倉萬箱又積峙於各邑倉庫則如山與其空爲其子女玉帛之費寧使優助軍資凡舟師器械什物兵器旗旄三手射炮粮等專屬於本營卽令永革田結之徵捧以紓農民之力何如 至於軍額之法流來已久雖不可卒然改革然制勝之略可以隨時變通盖兵務精不務多 苟能精銳一可當百若不精銳百不當一雖多亦奚以爲是以古之周世宗曰農夫百不能養一戰士何必浚民膏血養此無用之物乎乃大簡諸軍極擇以率士卒精强所向無前此亦可法也愚臣之計以爲一國軍案摠合元數然後拔其良民立爲正兵自十五歲至四十五歲 其間三十年使弓者弓之炮者炮之騎者騎之以出身之有官職者爲其掌官而課督之隨其所長而分以三等晝夜不撤坐臥不釋恒以爲習則其藝極妙可爲第一無敵除雜人之爲束伍者各以五名爲正兵一人之奉足其鞍馬兵器衣食各定數連綿辦給而其田結徭役亦自官復戶使其身上一無鞍馬兵器衣食妻子之念然後各官付近空地別成一部恒處其所 開市其中多屬匠人使不出方外不適場市勿與凡人相雜 嚴立禁法平居則專一其業 當亂則勇於赴敵又奉保五人中擇出數人在家習武有變則共赴戰所隨後而供其衣食與戰用之具正軍如或死亡卽充其代則行伍不亂而官無火丁減卒之費軍無凍餒窘乏之患 對陣進退之際兵勢衆多軍聲倍增在我之技已長在後之援亦備心有所驕思必試才臨敵倍勇恥爲人後爭爲先登進者功之退者斬之後日論勳戰死者贈以爵而榮厚其子孫遁避者斬其身而幷夷其妾子法旣嚴明心亦堅定終始一乃效以敢死則此非一當百者乎人皆如此則雖非一皆當百若使一當十則百可當千千可當萬萬可當十萬我兵豈不滿萬而敵兵又豈必過十萬哉况我國之兵曾有幾千萬者乎以數十萬各當數百萬則長平之卒可坑淝水之陣可破將無敵於天下矣是以他國兵法則皆然故戰必勝攻必克我國皆不然 故進亦亡退亦敗此目前之一明驗也嗚呼東國雖偏壤昔分三國尙能拒隋唐擧天下之兵力 今則合幷爲一以三倍全盛之安逸每取困於萬里遠來之疲兵誠有可痛也夫今者一哨中 各拔其一而奉以則必以元數之太減爲病然以束伍無用之五人換正兵幷後援之三名 則名雖差減而實則已多矣又有一策今之兩班之子出身之子庶孼貢生雜産之徒年纔二三十不文而皆業武鍊才欲試者如雲盈街塞巷而自言曰今日若得紅牌則明日雖爲沙場白骨何恨云云而科有定規無路得參常扼腕長嘆自分爲人間之一廢物衆心鬱抑未必無思亂之志脫有事變徒爲籍寇兵者也自今創設試法令各道別置武科之場勿限定數或以百步或以一技許以入格給牌歲取或千或萬人後又連設重試與重重試使不廢其鍊業之事又不沮其進就之心拔其尤而通仕路則十年間當得千萬精兵有恩而無怨未奉而自足不訓而自習民不亂而國有益養兵約而鍊業精與其奪人奴隸雜人苟充虛數曷若順得良家豪傑子弟以爲堂堂萬全豼貅之陣者哉且正兵子枝之産者過十年則皆爲丁壯其逃故人團束改充亦不患不足也通計一國軍額不至半減而百倍其利寧可守一前習而捨此百利乎况出身之兵與正兵之軍相爲雌雄而爭鍊技藝則在上之道只以賞罰勸獎而已而兵卒之精銳乃自然之理也然則將帥旣已極選軍兵又已極精而奉足亦多徵布永絶其路糧食隨到出食萬民均被科第之榮皆樂於赴敵則邊御之備至此盡矣臣謹按古制漢之南北軍唐之府兵宋之厢兵明之衛兵皆出於不得已隨時沿革變通而今此之擧亦隱然有漢唐兵農之分而不相害也孔子曰凡事好謀而成孟子曰師行而糧食睊睊胥讒軍旅雖非儒者之習而聖賢之言實無非責其成攻而戒其病軍也可不法哉且移去移來亂民之防弊莫如戶牌之爲善也往在丁卯經營三年規模已成法制將行而北兵一亂攻虧九仞亂非由此而輕動旋罷誠可寒心田旣量給民不移徙則公私無故犯作罪之人上下無橫行紊亂之弊農者務農工者業工軍爲軍奉爲奉卒不叛將奴不背主一心已定其分萬民各安其所國步以之盤石敵人以之畏慴有何難防之勢又何自危之機乎如欲行戶牌之法其則不遠易如反掌也愚臣之計以爲速出戶牌之令以正一國名分上自士人大夫下至軍兵公私賤官吏庶孼貢生及雜人之空遊無繫着者各有所屬僧人之無道帖而駄錢貿販者一禁行路巨梵太刹外野寺草庵則皆火之尼徒之居山谷者刷出歸農而焚其佛堂巫覡之亂雜閭里者皆有徵布而山上之神堂村中之神幕一皆毁去私奴婢之偸托公家者令訟官從文卷明査覈有誤決削職之罪而無希功劫奪之心至於咀呪之事有告寃者訟官雖不能明治坐律卽許聽理推其曲折嚴施刑訊則無恣行之弊有畏戢之風稍見止禍之效矣今年又有流民推刷之令故民多負債而撤耕散亡者不可以一流民一疋木之奉輕動一國之民前日流布尙已苦矣今又徵木其可再乎莫如姑爲停止待秋冬行戶牌之法則流散者還集閑遊者有屬萬民皆知其所歸各定其根本而國家亦自爾平安矣傳曰民惟邦本本固邦寧非此之謂乎大槪已上兩條皆是一國之大瘼當汲汲如救焚拯溺之不暇然凡大小緩急施爲非言之難聽之難也非聽之難行之難也行之之道惟在於乾剛獨斷勵精振作擇命大臣各專一責久任不遞時考其功則可見其效是以自古有爲之君必得一二藎臣作爲腹心專謀國政終成功業若寬柔仁慈猶豫狐疑至使委任之臣紛紛換易無可察職信彼而廢此朝令而夕止則譬如作舍道傍三年不成者也近者京外方一皆廢塵木而還用禁奢風而卽罷欲興學敎則出提督官與敎授訓長而士習日偸欲振綱紀則定鄕約正及有司直日而民俗益薄凡事目文牒滿紙張皇無不曲盡詳密而行移行會纔日月而玩愒尋常因爲停止徒示輕弱一未見令行禁止之威反同兒戱今雖鑄錢欲用亦必不得行矣自古俚語曰朝鮮公事三日而已云云者信不虛矣殿下以仁孝威明之資當危急存亡之秋灾異疊臻年且累凶國網已解民不畏法財力窮渴三南同然臣恐我國之憂不必西北而在於東南也噫士生天地付舁亦重幼而學者壯而欲行如臣者材雖樗櫟豈無萬一分寸之用而桑楡已迫久絶希望之路科程對策文不達意例不見收千里裹足一封難達適在今年因天灾時變之極下詔求言雖或過中不以爲罪臣年老矣敢以將死之言陳此目擊之弊狂僣已極固知難免天誅若不以文害意不以人廢言少加垂察則死日生年無異揚廷惶恐戰栗待罪千萬謹冒死以聞 批答에批曰省疏具悉 深嘉爾爲國慷慨之誠 所陳等事 當令廟堂議處焉
\"소(疏)를 살펴보니 모두 갖추었도다. 네가 나라를 위하여 강개(慷慨)하는 성의를 매우 가상하게 여겼노라. 진술한 일들은 마땅히 의정부(議政府)에 명하여 의논하여 처리하겠노라.\"라고 하였다.
(議政府)에서 (審議)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번역문」
하선(河璿)은 전에 대(代)를 이어 국록(國祿)을 먹던 신하로서 오랫동안 영남에 살면서 폐단을 목격하고 시대에 절실한 방책(方策)을 조목별로 진술한 것은 실로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에서 나왔고 또한 채택할 만한 말이 많이 있거니와, 근래 장수들이 한갓 백성의 재물을 빼앗는 짓만 하고 군사의 업무는 게을리 내버려두고 있는 것은 그런 일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을 선발하여 생긴 일이니, 이후에 선발할 때에는 청렴하고 재능이 있는 자를 가리고 지혜롭게 합당한 사람을 얻어서 책임을 맡겨 힘쓰게 하면 이러한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이옵니다.
각종 군병(軍兵)의 조련의 방법이 잘못 되었고, 멋대로 굴면서 가혹함이 많으며 한갓 빈 장부만 손에 쥐고 있어 무예를 뽐내지 못하니 갑자기 적과 맞서서 방어하는 데 대책이 없다고 말한 것은 실로 지금의 병폐에 맞는 것이되, 군사를 위로하고 도와주며 조련하는 것을 각기 마땅하게 하고, 전쟁에 임하여 힘을 발휘하게 하는 것은 전적으로 장수에게 책임을 맡겨야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쟁터에 가서 사망한 자를 물고(物故)나 사고로 처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 뒤에 가포(價布)를 이웃이나 가족에게 징수하고 있다는 주장은 매우 한심하니, 각 도(道)에 거듭 단단히 타일러 경계시켜서 이러한 종류를 조사해 내어 모두 잘못을 깨끗이 바로잡고, 관청에서부터 한정(閑丁)을 찾아내고 서둘러 금년까지 하나하나 가려내어 각 읍(邑)에서 대신 채우게 하십시오.
군사를 동원할 때 멀리 떨어져 있는 고을에서 군량을 운반하는 폐단은, 일의 형세가 원래 그럴 수밖에 없겠으나, 길 가에 있는 각 고을에서 쌓아둔 곡식을 조금씩 가져와서 사용함으로써 제거하고, 난리에 군량을 멀리 실어 보내는 폐단은 무사시(無事時)에 의론하여 정해야 할 계책에 관련됩니다.
속오(束伍) 군적(軍籍)을 매년 고칠 때에, 간사한 관리들이 연줄을 대서 면하려고 하니 군정이 혼란해 지는것은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도망하거나 탈이 난 자만 즉시 바꾸어 채워 이름마다 표시를 하고 매년 군적을 고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이 폐단을 막으십시오.
또한 가령 풍습이 무너져 향리에 좋은 풍속이 없고 백성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쫓는 것 등, 이러한 폐단을 없애려 하면 오직 교화를 밝히고 기강을 세워야합니다. 토지를 백성들에게 맡겨서 조세를 징수하는 것이 고르지 못한 폐단은 비록 이 같은 측면이 있어도 막중한 양안(量案)은 쉽게 바꿀 수 없고, 이것은 감사(監司)나 수령이 그 정도를 참작하여 그 정무를 고르게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사노비가 멋대로 상전을 배반하고 다른 곳에 의지하는 것도 말로(末路)의 각박함에 관계되고 잔약한 사족(士族)들이 세업(世業)을 보전하지 못하고 항심[(恒心) 변함없는 마음]과 항산[(恒産),생업]이 없다는 것은 가난함이 지나친 것이고 형세가 간혹 그럴 수 있으니, 외방(外方)에서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이러한 것들을 엄하게 다스려서 노비와 상전의 분수를 바로잡는다면 이것도 기강을 바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무당과 승려들이 요사스러운 재앙을 일으키는 폐단은, 근래 더욱 심하여 졌고 남방에서는 극심하여 앞으로 해악이 끝이 없을 것이라고 한 것은 과연 말한 것과 같지만, 비록 한꺼번에 철파하여 농촌으로 돌려보낼 수 없을 터이니, 점차 금하고 억제하여 양민이 서로 다투어 신당(神堂)이나 사찰로 들어가는 길을 막으십시오. 장수중에 그 직책을 잘 수행하고 군졸과 백성을 불쌍하게 여기어 은혜를 베풀고 청렴하고 검소하여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복종하는 자는, 임기를 따지지 말고 오래도록 맡겨서 그 공효(功效)를 책임지게 하십시오. 각 고을의 군적을 모아서 가려 뽑아 잘 훈련시키는 일에 관한 부분은 실로 생각해 볼 점이 있으나 이런 때에 이런 일은 가볍게 바꾸고 고쳐서 시행할 수 없습니다.
무과(武科)를 그만두고 널리 취하여 정병(精兵을 얻는 일에 관한 부분은 난리가 닥쳤을 때 힘을 발휘한다고 기대하기 어렵고 신역(身役)이 있는 군졸을 몰아내고 도리어 군역이 없는 출신(出身)으로 만든다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크므로 가볍게 거론하기 어렵습니다.
호패(號牌)는 참으로 좋은 법이고 몇 해 전에 창설했다가 이것을 없앤 뒤에 모두 다시 시행해야 한다고 여기지만 막중한 일은 마땅히 상의하여 처리할 것인바 지금 경솔하게 시행하기는 어렵습니다.
도첩(度牒)이 없는 중들은 출입을 금하는 일과 도성(都城) 밖의 승려들을 모두 쓸어내어 농업으로 복귀시키는 일에 관한 부분은 진실로 호패법을 시행하지 않으면, 그 일은 백성들이 놀라서 소동을 일으키게 될 것이므로 단번에 실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무당들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고 신당(神堂)을 짓는 것을 금하고 신당을 헐어야 하는 일에 관한 부분은 원래 무당에게 군포를 거두는 법이 있으며, 또한 귀신을 모신 사당을 금단하는 영을 내리고 곧 모든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에게 특별히 신칙(申飭)하게 하여 착실히 거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노비가 공천(公賤)으로 들어가는 것은 곧 오늘날의 큰 폐단이니, 나라의 모든 송관(訟官)이 상밀히 조사하여 밝게 처결하고 법을 엄격히 하여 징계하고 다스린다면 이런 폐습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유민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일은 이미 우선 못하도록 하였으나 아직 듣지 못하여 이런 진술이 있습니다.
소장의 끝부분에서 진술한 것은 대개 조정의 조치가 아침에 명령하고 저녁에 그만두게 하며 일에 실속이 없음을 지적하여 운운한 것이 온데, 살펴보건대 모든 조치가 형식에서 탈피하고 성실한 데 힘쓰는 것이 곧 오늘 시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
상항(上項)에서 진술한 것 중에 반드시 채납(採納)하여 시행하도록 한 일을 각 담당관아(官衙)에 신칙하여 거행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原文』
廟堂回啓曰 河璿以前啣世祿之臣 久居嶺外 目擊弊端 條陳切時之策 實出憂國之誠 亦多可擇之言是白在果 近來閫帥 徒事聚斂 怠棄戎務 銓選不得其人之致 此後掄選之際 別擇廉簡才 智得其人而責效 則可無此弊是白齊 各㨾軍兵操鍊 乖方侈虐多端 徒擁虛簿 技藝莫售 猝然臨敵 捍禦無策云者